"한국인들에게 '먹는다'라는 의미는 아주 각별하다. 한국인들은 연륜이 쌓여가는 것을 '나이를 먹다'라고 표현한다. 나이와 '먹는 행위'를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중대결심을 할 때도 '마음을 먹다'라고 한다. 효과가 있는 행위나 그 반대되는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먹힌다' 또는 '먹히지 않는다' '안먹힌다' 등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한국인들은 '먹다'를 아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먹방'의 기원이 한국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왕과 사는 남자'에서 단종과 엄흥도의 식사 장면은 무척 다채로운 상징을 담고 있다."
1500만 관객을 동원해 엄청난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해 어느 영어권 유튜버가 내놓은 해설이다. 지금 '왕사남'은 미국, 호주, 캐나다, 영국 등 영어권 나라에서 만만치 않은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름도 출신도 알기 힘든 외국 유튜버가 한국인 평론가들도 내놓기 힘든 이렇게 멋진 해석과 표현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젊은 시절 상당 기간 영화 기자로 일했던 필자 입장에서는 상당한 부러움과 함께 놀라움이 찾아왔다.
그 해설자는 또 이렇게 설명을 이어갔다. "한국인들에게 '정'은 감정의 신기루같은 것이다. 초대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정'이다"라고.
이제 '한류'를 우리끼리 해석하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인도영화 '다시 서울에서'가 넷플릭스 글로벌 순위 3위에 오르는 등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현실도 이같은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도에서는 발표 이후 수주가 지났지만 여전히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리 카르틱 감독의 이 영화에는 인도 배우 프리양카 아를 모한이 여주인공 '셴바' 역할을 하고 한국 배우 박혜진, 백시훈 등이 출연한다.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인도 타밀나두의 작은 마을 출신 여성이 항상 동경하던 한국에 가게 되어 겪게 되는 여러 사건들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 센바가 한국을 동경하게 된 계기는 K-팝은 아니고 그녀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연기했던 허황후에 얽힌 사연 때문이다.
허황후의 본명은 허황옥인데 김해김씨·김해허씨의 시조모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따르면 본래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이다. 부왕과 왕후가 꿈에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인도 시골마을에서 이같은 우리나라 설화를 기반으로 해서 연극을 만들었고 셴바가 그 역할을 맡으면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반드시 한국에 가겠다"는 필생의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인도 소녀의 한국 사랑이 단순히 K-팝 때문이 아니라 고대사까지 올라가는 양국의 인연을 강조한 셈이다.
인도 시골 소녀는 한국에 와서 말 그대로 온갖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게 되는데 그 사이에 만난 한국인들과의 따뜻한 인연이 이어지고 급기야 그 소녀의 도움을 받는 한국 아이돌 꿈나무들까지 등장한다.
어쨌든 발리우드로 유명한 인도에서는 할리우드 영화도 맥을 못추는데도 한류의 인기는 놀라운 수준이다.
외국에서 한국을 무대로 삼아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어 큰 인기를 모은 것들 중에는 발표 이후 몇주간 글로벌 순위 2위 자리를 지킨 '엑스오 키티'라는 드라마도 있다. 2023년 5월 18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미국 드라마인데 주인공 키티(애나 캐스카트 분)가 한국 국제학교에 와서 겪는 청춘 소동극이다. 워낙 인기가 좋아 현재 시즌3까지 준비되어 있다.
올해 아카데미 주제가상과 장편 애니상을 휩쓴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비록 감독이 한국계인 매기 강이고 주요 음악과 목소리 연기를 이재 등 모두 한국계 인물들이 책임졌지만 제작사는 바로 일본 소니였다.
◇BTS노믹스의 경제효과를 이해하려면 '아미'는 물론 거대한 '코리아부' 한류팬을 알아야
지난 2월 있었던 한국과 브라질 정상의 국빈 만찬에 K-팝 걸그룹 블랙스완의 브라질인 멤버 가비가 깜짝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가비의 손등에 키스하며 인사를 나눴고 이런 장면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도 올렸는데 순식간에 560만뷰를 돌파했다. 가비는 브라질 출신 K-팝 가수이다.
또 다른 하이브 소속 다국적 걸그룹 캣츠아이는 지난달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제68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자신들의 히트곡인 '날리'(Gnarly)를 불러 열광적 호응을 받았다. 캣츠아이는 한국, 미국, 스위스, 필리핀 등 다양한 국적의 멤버들이 활약하고 있는 그룹이다.
한류의 글로벌화는 이처럼 다양한 사례에서 이미 증명이 되고 있고 앞으로는 한류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을 듣고 보기 위해서는 국내 전문가뿐만 아니라 전세계 전문가들 해석을 찾아야 하는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지난 3월 21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BTS(방탄소년단) 무대는 26만명이 모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4만에서 10만명으로 추정되는 인파가 모여 실망감을 안기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26만명이라는 숫자는 과거 박근혜 대통령 탄핵집회에 모인 숫자를 추정한 것으로 어처구니없는 숫자였다.
하지만 넷플릭스 생중계 효과는 아주 컸다. 미국 연예 전문지 버라이어티는 'BTS 컴백 라이브: 아리랑'의 최초 스트리밍과 이튿날까지의 24시간 이내 시청자 수가 1840만명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공연은 24개국에서 넷플릭스 시청률 1위를 기록했고, 80개국에서 시청률 톱 10에 포함됐다.
뿐만 아니라 BTS의 정규 5집 '아리랑'은 영국에 이어 미국 앨범 차트 1위도 석권했다. 미국 빌보드에 따르면 '아리랑'이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했는데,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한 것은 '아리랑'이 일곱 번째다.
2018년 자신의 대학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BTS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앞으로 세계에서 경쟁력이 없을 것"이라고 예언해서 유명해진 한류학자 샘 리처드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교수는 '한국 문화의 재발견'이라는 글에서 한류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한국 문화는 지난 30년 동안 기술을 활용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뛰어난 통신 기술을 활용해 전세계로 문화를 전파했다. 이제 전세계가 한국 문화에 궁금증을 보이고 관심을 갖고 있다. K-팝과 K-드라마에는 한국 고유의 특성과 가치가 녹아있다. 누군가 나에게 '한국이 전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물어본다면 '지금하고 있는 것을 계속하면 된다'고 얘기할 것이다."
요즘에는 BTS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만 원래 그룹이름은 방탄소년단(防彈少年團)이다. 방탄은 '총알을 막아낸다'는 뜻인데 "10대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힘든 일, 편견과 억압을 우리가 막아내겠다"는 심오한 뜻을 담아냈다고 한다. 그룹 이름에 총알이 등장해서인지 그들의 팬덤은 역시 군대를 의미하는 아미(ARMY)이다. '군대처럼 BTS와 함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귀에는 아직 생소하지만 '코리아부'(Koreaboo)라는 말이 있다. '코리아부'는 서구권에서 한국인이 아님에도 지나칠 정도로 한국(인)을 숭배하면서, 어설프게 한국인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이다. 과거에는 비하적인 의미가 강했지만 지금은 '자발적 문화 전도사'로 진화하면서 'BTS노믹스'의 확장성을 보장하는 집단으로 성장했다.
이같은 흐름 속에서 BTS 등 한류열풍을 비틀즈와 비견하고 이미 비틀즈를 능가했다는 평가까지 나오는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알수 있다.
1964년 2월 9일, 비틀즈가 CBS '에드 설리번 쇼'에 처음으로 출연했을 때의 총 시청자 수는 약 7300만명으로 당시 미국 전체 가구의 약 45.3%가 시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미국 인구가 약 1억9000만명이었음을 고려하면, 미국인 3명 중 1명이 비틀즈를 보기 위해 TV 앞에 모여 있었던 셈이다.
당시 미국 언론에서는 이같은 현상을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런데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지난해 말 기준 시청자가 5억회 뷰를 돌파한 것을 보면 미국에서는 한류 전체를 '코리아 인베이전'이라는 단어로 표현할만 하다.
이와 관련 CNN, 포브스, 롤링스톤스 등 미국의 주요 매체들은 BTS가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고 에드 설리번 극장(현재 스티븐 콜베어 쇼 촬영지)에서 공연했을 때, 이를 "제2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이자, 첫 번째 코리안 인베이전"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한국인은 의심하고, 세계는 경탄하는 'K-인베이전'의 실체
미국에 '스위프트노믹스'가 있다면, 한국에는 'BTS노믹스'가 있다. 두 아티스트는 단순한 가수를 넘어 걸어 다니는 대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2023-2024년 투어를 통해 미국 내에서만 약 50억달러(약 6조7000억원)의 직접 소비를 창출했다. 공연이 열리는 도시마다 호텔 예약률이 폭등하고 지역 경기가 살아나는 '낙수효과'의 정석을 보여준 것.
BTS의 월드 투어 역시 테일러 스위프트의 기록에 필적하거나 이를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블룸버그 등 외신은 BTS가 34개 도시에서 진행하는 투어의 경제적 파급력을 테일러 스위프트와 비교하는데, 이는 BTS 팬덤(아미)의 높은 해외 이동성과 굿즈 소비력 덕분이라는 해석이다.
BTS의 경제효과가 이토록 거대한 이유는 한류가 단순한 '노래 감상'을 넘어 국가 브랜드의 인프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연 관람객의 상당수가 해외 팬이며, 이들은 한국에 체류하며 쇼핑, 식도락, 의료 관광까지 연결되는 '체류형 관광'을 주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BTS가 먹는 라면', 'BTS가 입는 옷'은 즉각 글로벌 수출 실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2024년 기준 한류로 인한 총수출액은 약 151억달러를 기록했다는 통계수치도 등장했다.
BTS의 경제효과가 100조원까지 거론되는 것은 이들이 한국이라는 국가의 '무형자산가치'를 그만큼 끌어올렸다는 방증이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미국 내수 경제의 활력소라면, BTS는 한국 경제의 글로벌 영토를 확장하는 엔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난 광화문 공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현상에는 지나친 낙관과 과장이 겹쳐지고 있는 현실을 직시했을 때 무조건적인 낙관은 금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난 한인 2세 유니 홍(Euny Hong)이 자신의 저서 '코리안 쿨의 탄생'에서 한국인들은 한류의 성공을 '정부의 전략'이나 '우연한 행운'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내용은 음미할만 하다. 그는 수세기에 걸친 '한'(恨)의 정서가 현대적인 세련미와 결합하여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강력한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결과물이 얼마나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는지 정작 본인들은 잘 모른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정말 이 정도인가?'라며 의심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의심하는 사이, 한류는 이미 누군가의 갈망이 되었고, 거대한 경제의 영토가 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자부심이 아니라, 이 거대한 흐름을 지속시킬 냉철한 확장성이다.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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