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박경찬 기자】소설가 이서아의 작품 세계는 단조로운 감정에 머무는 법이 없다. 초기작부터 신작 『방랑, 파도』에 이르기까지, 밝음과 어둠, 활력과 무기력 사이를 오가며 문장은 진화했다. 작가는 자기 안의 지친 마음과 명랑한 마음, 그리고 낯선 화법에 대한 갈망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작품의 변화는 철저한 계획보다는 작가의 상태가 자연스럽게 반영된 결과에 가깝다. 그는 “매 순간 작품에 쏟는 마음이 다르기에 이야기도 달라지는 것”이라며 이번 작품 또한 특정한 기획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왔음을 고백했다. 이어 “부족함을 느낀다는 것은 곧 사랑할 대상이 아직 많다는 의미”라며 집필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번 소설은 두 개의 강렬한 잔상에서 시작된다. 파도를 타는 서핑의 장면, 그리고 침대 밑에 떨어진 사물을 찾기 위해 엎드린 순간이다. 작가는 엎드린 자세에서 ‘절’과 같은 경건함을 느끼며, 그 감각을 따라 이야기를 넓혀 간다. 지친 상태에서 마주한 이미지들을 그저 묵묵히 뒤쫓은 결과다.
이처럼 『방랑, 파도』는 치밀한 설계보다는 감정의 파동과 이미지들이 쌓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빈틈없는 서사가 아니라 그 안을 흐르는 인간의 ‘삶의 태도’ 그 자체다.
Q. 『어린 심장 훈련』(문학과지성사, 2024), 『키오스크 학교』(민음사, 2025) 이후 이번 작품을 집필하면서 작가님 스스로 달라졌다고 느낀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대단한 변화가 있었다고 답하고 싶지만, 작은 변화에 대해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학에 대한 사랑이 초라해졌다가 다시 충만해졌습니다. 이것이 저의 달라진(혹은 처음으로 돌아간) 점입니다.
집필 기간만 두고 보면 전작 『키오스크 학교』와 이번 책 『방랑, 파도』는 비슷한 시기에 쓰였는데요. 사실 첫 책 『어린 심장 훈련』을 낸 후 한동안 읽는 일도 쓰는 일도 버겁게 느껴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쓰고 싶은 것은 이상하게 계속 찾아오더군요. 그래서 『키오스크 학교』와 『방랑, 파도』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여러 계절을 지나 두 책을 완성하는 동안 서서히 그러나 더욱 분명하게 생각했습니다. ‘역시 나는 이 일을 가장 사랑한다, 누가 뭐라 하든 이건 내게 아주아주 긴급하고, 조심스럽고, 소중한 세계다’라고요.
여담이지만, 제가 보더라도 두 책의 성격이 많이 달라 보이는데요. 계획했던 건 아닙니다. 제 안에는 깊이 지친 마음과 명랑한 마음과 펄쩍펄쩍 뛰고 싶은 마음과 저 자신에게 낯선 방식으로 말해보고 싶다는 열망 같은 마음이 다 있는데요. 매 이야기를 쓸 때마다 바치는 마음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각기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아주 다르게 보이는 이야기들이 분명 어떤 면에서는 맞닿아 있다는 것을 언젠가 누군가가 발견해 주신다면 기쁠 것도 같습니다.
지금 제가 두 책에 대해 자신만만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에요. 이것저것 시도하는 동안 제 마음에는 그만큼의 아쉬움과 부끄러움도 분명 쌓여 있어요. 그런데 제가 어느 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은 배울 것과 읽을 것, 새로 사랑할 것이 아직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저의 부족함을 동력으로 삼아, 쌓여 있는 마음까지 귀한 자원 삼아 앞으로도 계속 즐겁게 열심히 써보려고 합니다. 살다가 언젠가는, 모든 마음이 작품 속에서 더 근사한 방식으로 얽히는 순간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Q. 『방랑, 파도』는 세 개의 단편이 서로 다른 세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읽다 보면 하나의 큰 물결과도 같이 이어지는 감각이 있습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떠올렸을 때, 어떤 장면이나 이미지에서 출발했는지 궁금합니다.
두 가지 장면이 동시에 소설을 출발시켰습니다. 하나는 서핑이고, 다른 하나는 침대 밑의 작은 사물을 줍는 이미지입니다. 후자는 아무래도 침대 밑에 작은 물건이 굴러 들어간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목격한 이미지이자 겪어본 경험이 아닐까 하는데요. 침대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바닥에 대고 그 옆을 바라보는 일이 마치 절하는 것처럼 연상돼 그 연상을 천천히 따라가며 썼습니다. 물론 실제로 절을 하는 신자가 어딘가로 고개를 돌리면 딴짓하는 중일 가능성이 높겠지만요. 동시에 침대 밑의 풍경, 즉 침대 밑의 길쭉하고 어둑한 틈도 함께 연상되기에, 소설에 썼지요. 몇 번 시도해 본 적 있던 서핑 역시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물 흐르듯이 쓰게 됐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쉽게 쓴 것처럼 느껴지지만 『방랑, 파도』에 제가 바친 마음은 지친 마음에 가깝습니다. 쓰면서 전혀 쉽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좀 힘들었어요. 말하자면 한 명의 지친 사람으로서 저는 저에게 찾아온 이미지들을 순순히 따라다녔다고나 할까요. 이야기를 쓰는 사람으로서 누구에게나 깊이 지치고 슬픈 마음이 있고, 그 마음에 충실함으로써 그 마음을 작품에 바치는 제의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쓰고 싶을 때라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빗금의 논리」를 쓰고, 「향자」를 썼는데요. 「향자」를 쓸 무렵에는 찾아온 것을 따라다니기만 하지는 않았어요. 아예 통으로 갈아엎기도 했으니까요. 덕분에 크게 마음고생도 했는데 그것이 기묘한 활력이 되기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향자’에 대해 제가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이야기를 적고 싶었거든요. 물론 “좋은 이야기”라는 건 텅 빈말에 불과하지만, ‘향자’를 사랑하고 또한 추모하는 저만의 방법은 가능한 가장 “좋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Q. 『방랑, 파도』에서는 요양원, 바다 같은 공간 또한 인상적으로 등장합니다. 작품의 배경을 구상할 때 특별히 떠올린 풍경이 있었나요.
말씀하신대로 요양원과 바다를 가장 중요하게 떠올렸어요. 아무래도 요양원에 대해 떠올릴 때는, 이번 책에 실린 에세이를 보면 아시게 되겠지만, 제가 잠깐 방문했던 그 요양원의 풍경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그 요양원은 간호직 공무원인 어머니가 근무하던 보건소와 연계된 곳이었고, 제가 요양원에 방문해 아주 잠깐 일손을 도와드리기도 한 곳입니다.
바다는 어떤 특정한 지역의 바다를 떠올리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지역의 바다는 결국 우리의 기억 속에서 한 물결이 돼 흐르지 않나요? 마치 모두 같은 바다였던 것처럼 말이에요. 사실 바다라는 건 원래 이 세상에 하나인데, 사람들이 이름을 붙여 나누어 살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바다를 떠올릴 때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관념이야말로 바다의 본질과 가장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쉽고 간편하게 정리할 수 있는 말을 정성 들여 풀어내는 방식의 유희가 우리 삶에 존재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는 서류만이 남겠지요. 그 외에 공터에 대해서도 많이 떠올렸는데, 읽는 분들께서 자유로이 상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슬픔은 전문성과 세련됨을 박탈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전문적이고 세련된 슬픔만을 환대한다.” 「방랑, 파도」 속 이 문장은 오늘날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마주하며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통찰처럼 읽힙니다. 작가님만의 ‘슬픔의 방식’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사실 저는 슬플 때의 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건 조금 초라하고, 별로 전문적이지도 세련되지도 않고, 자랑스러운 모습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방에 저를 가둬 두고 사람을 만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합니다. 만나면 실수하게 될 것 같고, 이미 실수해 본 경험도 있으니까요. 사실 정말 슬플 때는 제가 판단해서 의도적으로 외출을 멈추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할 기력이 안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슬픔이 저를 방에 가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영원히 방에서 나오지 않는 일을 막기 위해 제가 하는 ‘슬픔의 방식’은, 에세이에서 소개했듯이, 친구들과 우스운 이야기를 하며 엄청 웃는다든지 출근을 한다든지 운동을 간다든지와 같은 세속적이고 단순한 루틴을 형성하는 움직임들이에요. 물론 그것만이 나를 위한 혹은 우리를 위한 ‘슬픔의 방식’의 전부는 아니겠지요.
Q. 세 편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실 이후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삶의 모습이 있었나요.
평소에 인물을 쓸 때 스스로 생각하는 게 있다면 명확히 어떤 사람인지 딱 말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써보고 싶다는 거예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인간 군상들이라고 할까요. 대부분의 사람이 여기에 머무르며 사는 것 같거든요.
그러나 소설이라는 게 현실을 정확히 서술하는 기능적 역할만을 수행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 아주 선하거나 아주 악한 인물을 의도적으로 씀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작품을 창작할 때의 다소 연극적이고 의도적인 어떤 기술을 이야기하는 거지, 특정한 삶의 유형을 성자로 추앙하고 또 다른 특정한 삶의 유형은 빌런이라고 몰아붙이는 엄중한 잣대가 소설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삶을 살 때, 그리고 어떤 인물을 대할 때, 대단한 사랑과 증오를 느끼는 일이 종종 있지만, 그것이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절대적인 진실이 될 수는 없을 테니까요.
한편으로 이런 자세가 ‘결국 좋은 게 좋은 거다’, ‘모든 사람은 다 사연이 있을 테니 이 세상에는 그 어떤 일도 분노할 가치가 없다’와 같은 마음이 되지는 않고자 합니다. 이것이 저의 중요한 고민거리 중 하나인데, 아마 오랫동안 붙들고 살 화두가 될 것 같기도 해요. 한마디로 말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란 게 있지 않나?’ 하는 거죠. 소설가가 모든 상황으로부터 제삼자처럼 동떨어져서 모든 세상 만물을 혼자 다 이해해 버린다면, 그건 소설가가 자기 자신에게 모든 일을 용서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권한과 합리적인 역할을 스스로 부여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 역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요. 물론 일상에서는 많은 것을 그러려니 하는 습관이 현명한 것이겠지만, 소설을 쓸 때는 확실히 많은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를 이해하려다가 결국 ‘방관하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요. 두려워해야 마땅하고요.
Q. 소설가로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라고 스스로에게 좀 많이 물어보았던 것 같아요. 소설의 ‘나’가 현실의 저라는 건 아니고요. 소설과 인터뷰와 이런저런 지면들을 통틀어 제가 어떤 말을 할 때 말이 혼자 너무 자유로워지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에요.
다시 말해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기본적인 자각도 없는 상태에서, 말만 부풀려지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이번에 에세이에 쓴 문장 하나를 여기 옮겨보자면, 저는 소설이 은유와 환유의 느슨한 놀이터가 돼야 한다고 믿는데요. 여전히 그 생각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소설의 언어는 분명 자유로워야 해요. 그런데 그것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누군가 멋지게 해석해 줄 테니 아무렇게나 떠들자’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그건 자유로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읽는 이들에게 의존하는 태도로 보이기도 하거든요. 그건 오히려 구조에 더욱 단단히 결속되는 태도 아닐까요? 어차피 총명한 눈을 가진 독자나 비평가라면 아무렇게나 쓰는 작가의 태도를 귀신같이 눈치채겠지만요.
하나 더 생각하는 게 있다면 “이 인물이라면 정말 그렇게 행동할까?”입니다. 제가 원하는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서 인물이 소모되거나 하는 건 지양하고 싶습니다. 타인에 대해 생각하듯이 제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Q.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이나 추천하고 싶은 작가가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올해 초에 읽었던 사이 몽고메리의 『거북의 시간』(돌고래, 2025)을 추천합니다. 거북이 구조 현장에 대한 논픽션인데, 봄의 시작과 함께 읽기에 무척 좋은 책입니다. 사이 몽고메리가 일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언어로 거북 구조 현장에 대해 기록하며 거북이들의 사랑스러움과 회복의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하는데요. 참담한 사고를 겪은 후에도 기어코 생을 살아가는 거북이들의 담담한 분투와 그들을 돕기 위해 치열하고도 명랑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따라 읽다 보면 처음에는 깊은 슬픔과 겸양을, 그리고 기묘한 희망과 활력을, 또한 생명과 자연에 대한 경이와 사랑을 느낄 수 있어요. 부디 야생의 존재들이 자유롭고, 건강하고, 평온한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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