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실 한복판의 하트 러그부터 공병으로 재탄생한 바디오일
- 우드톤 가벽 너머 침실의 푸른 침구
- 조리 동선까지 고려한 주방의 정교한 배치
집은 꾸미는 게 아니라 들키는 곳이다.
물건은 주인의 성격을 숨기지 못한다. 나만의 공간을 구성하는 원칙은 간결하다. 손에 자주 닿는가,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가, 그리고 지독하게 나를 닮았는가. 이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 것들은 결국 방 밖으로 밀려난다. 취향으로 잔뜩 범벅된 공간을 향유하는 일은 이 기준을 얼마나 정교하게 유지하느냐에 달렸다.
화이트 가구로 통일된 거실 전경. 한복판에 블랙 앤 화이트 패턴의 하트 러그가 놓여 있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현관문을 열면 거실 한복판에 놓인 하트 모양 러그가 발을 받아낸다. 블랙 앤 화이트의 기하학적인 패턴이 새겨진 물건이다. 동그란 것도 아니고 네모난 것도 아니다. 심장을 적당히 흉내 낸 모양새를 하고선 '하트'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컬러를 초록으로 할까 고민했지만, 결국 쉽게 질리지 않는 모노톤을 골랐다. 배경과 잘 융화되면서 사계절 내내 어울리는 선택이다.
프리랜서로서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사각형이나 원 같은 단순한 형태보다는 시선이 머물 때마다 지루함을 덜어줄 특이점이 필요했다. 직선으로 뻗은 바닥 위에 이 곡선을 툭 얹어두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경직된 기운은 걷힌다. 화이트 가구들 사이에서 이 이질적인 점 하나는 거실의 인상을 결정한다. 인테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조화가 아니라 적절한 불협화음이다.
티코스터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거실 장식장 위 티코스터와 바디오일 공병. 쓰임을 다한 공병이 오브제로 재탄생했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거실 장식장에는 최근 선물 받은 티코스터가 놓여 있고, 티코스터 위에는 찻잔 대신 다 쓴 바디오일 공병이 올라가 있다. 내용물은 진작 비워졌지만 브랜드의 철학이 응축된 패키지의 균형감이 좋아서, 곁에 두고 싶었다. 잘 만든 물건은 쓰임이 다해도 자체로 근사한 오브제가 되는 법이다. 어떤 사물은 비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인테리어로 완성되기도 한다는 걸, 공병을 티코스터 위에 다시 세워두면서 깨달았다. 버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버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향에 대한 기호와 미적 취향을 공간에 남겨두는 일이기도 하고.
티코스터가 직접 고른 러그와 같은 브랜드의 조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취향을 읽힌 것 같아 머쓱하면서도 반가웠다. 취향이 맞는 선물은 지루한 안부보다 고단수다. 내 안의 색깔이 타인에게 해석되어 다시 사물의 형태로 돌아오는 경험은 꽤 근사한 일이니까. 억지로 맞춘 세트 가구는 금방 질리지만, 직접 고르고 누군가 알아채 준 물건들이 뒤섞인 풍경은 공간을 비로소 살아 있게 만든다. 단순한 소유보다 깊은 이해에 가까운 무언가다.
우드톤 가벽 프레임 너머로 보이는 침실. 나무 결 사이로 빛이 스며든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거실이 타인에게 보여주는 편집본이라면, 침실은 뒤에 숨겨둔 날것에 가깝다. 잠드는 곳과 딴짓하는 곳만큼은 물리적으로 갈라놓아야 한다는 규칙에 따라 우드톤 가벽 프레임을 세웠는데, 나무의 결 사이로 빛이 잘게 쪼개져 들어오는 각도가 좋아서 골랐다. 거실의 화이트 톤이 차가운 편이라면 가벽 너머의 침실은 조금 더 짙고 포근한 농도를 띤다. 얇은 프레임 하나가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나를 적당히 떨어뜨려 놓는 셈인데, 경계는 때로 벽보다 투명한 프레임 하나로 충분하다는 걸 배웠다.
아이보리 바탕에 푸른 침구가 깔린 침대. 벽면에는 모네의 포스터와 엽서, 강아지 키링이 보인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계절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장소도 역시 침실이다. 거실은 모노톤으로 힘을 뺐지만, 침실만큼은 아이보리 바탕 위에 초록과 파랑의 색채를 섞어 쓴다. 나무 프레임과 어우러진 푸른 침구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어서, 사실 침구를 바꾸는 일은 스스로에게 건네는 가장 성의 있는 안부이기도 하다. 벽면에 붙여둔 모네의 포스터와 엽서, 뜬금없이 매달린 강아지 키링까지, 이런 것들이 나만의 계절감을 완성하는 장면들이 된다.
모든 배합에 대단한 인테리어적 의도가 깔려 있는 건 아니다. 시선이 자주 머무는 곳에 좋아하는 것들을 가져다 두었을 뿐인데, 쌓인 조각들이 가장 편안한 질서가 되었다. 남들이 보기엔 어수선한 조합일지 몰라도, 사소한 것들이 모여 비로소 쉼의 온도를 결정한다는 걸 알고 있다. 통일감보다 중요한 건 편안함이니까.
주방 수납걸이와 조리 도구들. 손만 뻗으면 필요한 것이 잡히도록 배치되어 있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주방은 조금 더 집요한 질서를 따른다. 나를 위한 정리정돈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보다 훨씬 정교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납걸이 하나도 조리 동선을 고려해 배치했는데, 손만 뻗으면 필요한 게 잡히는 배열은 도시의 일상에서 쌓인 피로를 덜어주는 장치가 되어준다.
머그컵 안에서 티백이 우러나는 모습. 투명했던 물이 호박색으로 물들어간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작은 식탁 위에 패턴이 담긴 테이블보를 씌우고 위에 아끼는 디자인의 머그잔을 올리는 일까지 마치고 나면 주방은 비로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주방은 가장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곳인 동시에, 가장 정적인 휴식을 준비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걸, 공간에서 배웠다. 결국 효율이 확보된 공간에서만 여유는 제대로 작동한다. 미학은 동선을 이긴 적이 없다.
하루를 닫는 시간에 차 한 잔을 내려 마시는 행위는 오늘을 매듭짓는 의식이다. 세워둔 규칙들이 나를 단단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머그잔 손잡이에 티백 끈을 감아두는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는 건, 뜨거운 물을 부을 때 티백이 가라앉는 사소한 거슬림조차 허용하고 싶지 않은, 나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다. 성가심들이 모여 결국 방해 없는 온전한 휴식을 만든다는 걸, 알고 있다.
투명했던 물속으로 찻물이 번져 나가며 컵 안의 색을 바꾸는 과정을 지켜본다. 맑은 것이 서서히 호박색으로, 혹은 깊은 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정적인 움직임에 시선을 두는 밤. 머그잔의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질 때 비로소 오늘의 일과가 끝났음을 실감한다. 유행하는 인테리어는 쉽게 질리지만 손에 익은 물건은 낡을수록 힘이 생기는 법이다.
글을 마치며
오늘도 손때 묻은 물건들 사이에서 일상을 이어갈 뿐이다. 고른 사물들이 나보다 먼저 나를 알아봐 주는 공간은 외롭지 않다. 방 안을 채운 물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며 주인을 기다리고, 때로는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사물들이 먼저 말해주기도 한다. 취향은 집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기 마련이고, 사물들은 늘 주인보다 먼저 사실을 알고 있다.
Copyright ⓒ 에스콰이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