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최저기증률…하루 8명 이식 기다리다 사망
제도 확대만으로는 부족…부정적 인식 개선이 관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면 ‘의인’이라 부릅니다. 뇌사 장기기증은 단 한 번의 결정으로 최대 8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더 큰 의미를 지닌 선택입니다. 하지만 국내 뇌사자 장기기증은 지속적인 감소세를 보이며 역대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반면 인구고령화로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이 기증을 기다리다가 삶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이에 헬스경향은 뇌사자 장기기증의 의미와 현주소를 짚고 구조적 원인을 분석,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제를 살펴봤습니다.<편집자 주>
국내 뇌사자 장기기증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보건복지부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KONOS)에 따르면 지난해 뇌사 장기기증자는 370명으로 2016년 정점을 찍은 이래 1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장기이식 대기자는 2015년 2만7444명에서 2024년 5만4789명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2024년 기준 하루평균 8명이 이식을 기다리다가 사망한다.
이에 전문가들은 장기기증에 있어 ▲가족동의 중심 구조 ▲의료 불신 ▲기증자·유가족 지원 부족이라는 ‘삼중장벽’을 먼저 해소하지 않으면 제도 확대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지적한다.
■가족동의 단계에서 좌절...유족 심리부담 덜어야
현행 장기이식법은 본인과 가족 동의를 전제로 하는 ‘옵트인(Opt-in)’ 구조다. 문제는 고인이 생전에 기증의사를 밝혀도 사후에 가족이 반대하면 기증이 불가능하다는 것. 현재 우리나라의 가족동의율은 33% 수준으로 미국·캐나다 등 선진국의 90% 안팎에 비해 현저히 낮다.
실제로 장기기증은 대부분 이 단계에서 멈춘다. 유교문화권 특성상 신체 훼손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히 강한 데다 2017년 발생한 장기기증 유가족 사후처리 논란은 사회적 불신을 더욱 키웠다. 이후 제도는 개선됐지만 국민 인식은 여전히 제자리다.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박순철 장기이식센터장(혈관이식외과 교수)은 “뇌사상태라는 갑작스러운 상황을 마주한 가족들이 장기기증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을 느껴 거부의사를 표시, 결국 무산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이에 우리나라도 거부의사가 없다면 모든 국민이 장기기증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는 ‘옵트아웃(Opt-out)’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국가는 별도의 거부등록체계를 구축, 생전에 이를 통해 거부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한 장기기증에 동의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미국 역시 우리나라처럼 옵트인 제도를 적용하고 있지만 장기 수요가 증가하면서 옵트아웃 제도로의 전환이 논의되는 상황이다.
현장 전문가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통한 장기기증 인식개선이 우선이라고 지적한다.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이 열려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제도가 적용되면 한국인의 정서상 강요로 느껴 되레 반발심만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김동엽 상임이사는 “일정한 비율의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를 보유한 나라의 경우 옵트아웃 제도를 고려할 수 있다”며 “영국은 2020년 이 제도를 도입했는데 당시 희망등록률이 39%였지만 현재 우리나라는 3% 정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의료진의 설명방식도 중요한 변수로 꼽힌다. 해외에서는 “고인의 결정을 존중해달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반면 국내에서는 선택의 부담을 가족에게 떠넘기는 구조라는 비판이 나온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이삼열 원장은 “유가족의 상실감을 고려해 설득이 아니라 고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설명’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유족의 동의과정 자체가 치유과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 차원 기증자 예우 필요…부정적 인식 없애야
‘2025년 장기·인체조직기증에 대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9명이 장기기증을 알고 있지만 설문 조사 대상자 중 실제 희망등록률은 2.9%에 불과했다. 가장 큰 이유는 ‘신체훼손에 대한 우려’(45.0%)로 현 장기기증시스템에 대한 신뢰부족과 직결된다. 기증 이후 시신훼손, 장례과정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그것이다.
이삼열 원장은 “현재 조직원은 20여개 병원에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를 파견해 기증상담부터 기증 후 상처봉합, 장례까지 신체훼손을 최소화하면서 고인의 숭고한 희생을 기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증자 예우 역시 미흡하다. 위 인식조사에 따르면 ‘기증자 예우 및 지원제도’를 알고 있다는 응답은 11.6%에 그쳤으며 국민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지원은 ▲직접적 지원금(57%) ▲사회적 추모 및 예우(21.1%) 순이었다. 현재 정부가 기증자 유가족에게 제공하는 공식적 지원은 ▲장제비 최대 360만원 ▲진료비 최대 180만원 ▲유가족 심리상담(횟수 제한)으로 한정돼 있다.
반면 해외에서는 장기기증을 사회적으로 제도화해 기증자 및 유가족을 기리고 있다. 미국·일본·프랑스 등은 추모공원과 기념공간을 조성했으며 일부 국가는 유가족과 이식자 간 교류도 허용한다. 반면 국내에는 보라매공원 ‘뇌사 장기기증인 기념공간’이 유일하며 접근성과 인지도 모두 낮은 실정이다.
대한이식학회 김범석 이사장(세브란스병원 신장내과 교수)은 “학회 치원에서 도심 근교에 ‘생명나눔 추모공원’ 조성방안을 복지부에 계속 건의하고 있다”며 “국가유공자에 버금가는 예우를 통해 사회로부터 존중받는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울대병원 장기이식센터 정해미 수간호사는 “추모행사를 위해 유가족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우리를 기억해 줘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끝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향후 장기기증자 유가족들이 장기이식을 필요로 할 때 우선권을 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2021년 국민권익위가 실시한 ‘국민생각’ 설문조사에 따르면 향후 기증자 또는 가족에게 장기이식이 필요할 때 우선권을 주는 이스라엘의 제도에 대해 응답자 69.5%가 찬성했다.
삼성서울병원 박재범 장기이식센터장(이식외과 교수)은 “장기기증 활성화를 위해서는 단순한 금전보상 확대보다 기증자의 마지막 길을 존중하는 의식이 중요하다”며 “유가족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돌봄, 기증자와 가족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문화를 함께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유가족 트라우마 등 정서적 지원 필수
갑작스러운 뇌사판정은 가족에게 큰 충격과 트라우마를 남긴다. 유가족 자조모임인 ‘도너패밀리’에 따르면 많은 유가족들이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과 죄책감을 호소한다.
사회적 오해도 상처를 더한다. 일부 유가족은 ‘돈을 받고 가족을 팔았다’는 왜곡된 시선을 경험하기도 한다. 2020년 딸의 장기기증을 결정한 김가은 씨(가명)는 “기증 후 금전적 보상을 받았느냐는 말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심리상담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단기적 지원에 그친다는 지적이다.장기기증과정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충격은 장기관리가 필요한 영역이다. 따라서 유가족을 위한 전문적인 정신건강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장기기증에 대한 교육 확대 필요성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2023년 대입시험 및 의사국가시험에 관련 문항 반영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울대병원 민상일 장기이식센터장(이식혈관외과 교수)은 “장기기증은 마음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제도 변경만으로는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며 “초·중·고 교육과정에 생명나눔의 가치를 담아 국민이 자발적으로 장기기증에 동참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서울병원 장기이식센터 차소라 장기기증 코디네이터는 “장기기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성교육처럼 어릴 때부터 정서적으로 친숙한 필수교육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