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만 해도 크론병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없는 병이었다. 한 명의 환자를 진단하면 학회에서 발표할 수 있었을 정도다. 그런데 지금은 소아 소화기 외래를 하면서 크론병 환자를 보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 크론병은 원래 북미와 유럽에서 흔한 질환이었으나,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서 지난 20~30년간 발생률이 빠르게 증가했다. 무엇이 이렇게 바뀐 걸까.
유전자는 30년 만에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환경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 환경 변화의 중심에 음식이 있다. 크론병은 음식이 병을 만들 수도 있고, 음식이 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질환이다.
크론병이란
크론병은 입에서 항문까지, 소화관 어디에나 만성 염증이 생길 수 있는 난치성 질환이다.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면역 체계가 자신의 장을 적으로 인식해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원인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완치라는 개념이 없고, 평생 약물 치료와 식이 관리가 필요하다. 복통, 설사, 혈변이 반복되고, 성장기 아이들에게는 성장 부진이라는 치명적인 문제가 동반된다.
소아청소년기에 진단되는 비율이 전체 크론병의 약 25~40%에 달한다. 소아 크론병은 성인보다 침범 범위가 넓고 경과가 더 심한 경우가 많아, 조기 진단과 적극적인 치료가 중요하다.
음식이 원인이다: 서구화된 식단과 초가공식품
크론병의 원인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는 비유가 있다. "유전자가 총을 장전하고, 환경이 방아쇠를 당긴다(Genetics loads the gun, environment pulls the trigger)." 크론병에 걸리기 쉬운 유전적 소인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일란성 쌍둥이 연구에서도 한쪽이 크론병일 때 다른 쪽이 걸릴 확률은 50%를 넘지 않는다. 유전자가 100% 같은데도 절반 이상은 발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환경 요인이 결정적이다.
크론병 발생률이 높아진 나라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식생활이 서구화되었다는 것이다. 동물성 지방과 정제된 탄수화물이 많고 식이섬유가 적은 식단, 이른바 'Western diet'으로의 전환이다. 패스트푸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식탁도 30년 전과 비교하면 고기 섭취량은 크게 늘었고, 잡곡밥이나 나물 반찬은 줄었다. 대규모 전향적 코호트 연구들에서 Western diet 패턴의 식사를 하는 사람은 크론병 발생 위험이 높고, 과일, 채소, 생선, 식이섬유가 풍부한 식사를 하는 사람은 위험이 낮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확인되었다.
최근에는 초가공식품(ultra-processed food)이 핵심 위험인자로 부상하고 있다. 초가공식품에 포함된 유화제, 인공감미료, 식품첨가물 등이 장 점막의 보호 장벽을 손상시키고 장내 미생물 환경을 교란시킨다는 연구가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 서구화된 식단은 장내 미생물의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장 점막의 에너지원이자 염증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짧은사슬지방산(short-chain fatty acids)을 만들어내는 유익균을 줄인다. 장 점막이 약해지면 장내 세균이 면역 세포를 자극하게 되고, 유전적 소인이 있는 사람에서 이것이 만성 염증으로 이어진다.
음식이 크론병의 방아쇠를 당긴다면, 음식으로 그 방아쇠를 되돌릴 수는 없을까.
음식이 치료다: 완전경장영양, '먹는 치료제'
놀랍게도, 답은 '그렇다'이다. 소아 크론병 치료에서 경장영양요법(exclusive enteral nutrition, EEN)은 이미 1차 치료로 자리 잡았다. 일반 음식을 완전히 중단하고, 특수 제조된 경장영양식만으로 6~8주간 영양을 공급하는 방법이다. 스테로이드와 동등한 관해 유도율(약 80~85%)을 보이면서도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이 없고, 성장기 아이들에게 필수적인 영양까지 공급한다. 유럽과 북미의 소아 크론병 가이드라인에서 약이 아닌 이 영양요법이 1차 관해 유도 치료로 권고되고 있다.
약이 아니라 '음식'으로 장의 염증을 잡는다는 것이 처음에는 믿기 어렵다. 하지만 기전은 비교적 분명하다. 경장영양식은 장내 미생물 환경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손상된 장 점막 장벽을 회복시키며, 과도한 면역 반응을 억제한다. 일반 음식에 포함된 여러 항원과 첨가물이 제거된 상태에서 장이 '쉬면서 회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음식이 병을 만들 수 있다면, 음식을 바꾸는 것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이보다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드물다.
완전경장 이후에도 일반 음식과 함께 경장영양식을 병행하는 부분경장영양(partial enteral nutrition)이 관해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들이 축적되고 있다. 소아 크론병 환자들에게 경장영양식은 단순한 영양보충이 아니다. 극심한 복통 속에서도 영양을 공급받고, 약물 선택지가 제한된 소아 환자에서 성장 부진과 영양 결핍을 막는 실질적인 치료 수단 중 하나이다.
미국 식이지침 2025-2030: "진짜 음식을 먹자"
크론병이라는 특수한 질환에서 음식의 역할이 이렇게 극적이라면, 크론병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음식은 중요하지 않을까. 2026년 1월 발표된 미국 식이지침(Dietary Guidelines for Americans) 2025-2030이 이 질문에 답을 준다.
미국 농무부(USDA)와 보건복지부(HHS)가 5년마다 공동 발표하는 이 지침은, 수천 편의 연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양 정책 문서다. 이번 지침은 40여 년 만에 가장 큰 변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핵심 메시지는 단순하다. "진짜 음식을 먹자(Eat Real Food)." 초가공식품을 명시적으로 제한하는 첫 번째 미국 식이지침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이다.
이 지침이 나온 배경에는 미국의 건강 위기가 있다. 성인의 70% 이상이 과체중 또는 비만이고, 12~17세 청소년의 거의 3명 중 1명이 당뇨병 전단계에 있다. 우리나라도 이 길을 따라가고 있다. 식생활이 서구화되고 초가공식품 소비가 늘면서 소아비만과 대사질환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크론병을 포함한 염증성장질환도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이번 지침의 표지에는 단백질, 유제품, 건강한 지방, 채소와 과일, 통곡물이 담겨 있다. 빠진 것이 눈에 띈다. 과자, 음료수, 소시지, 햄, 냉동 피자 같은 초가공식품이 없다. 신선한 식재료는 거의 다 좋다는 것, 문제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가공식품이라는 것. 40년간의 연구를 거쳐 미국이 내린 결론이다.
아이들의 식탁이 더 중요한 이유
크론병이든 비만이든 지방간이든,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우리 아이들이 매일 먹는 음식이 장을 바꾸고, 면역을 바꾸고, 건강을 바꾼다.
어린 시절의 식습관은 장내 미생물 환경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릴 때부터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에 익숙해진 아이의 장내 미생물은 전통적인 식단으로 자란 아이와 분명히 다르다. 미각이 형성되는 시기에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지면 신선한 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미국 식이지침도 이 점을 강조했다. 생애 초기의 식습관이 평생 건강을 좌우한다고.
외래에서 크론병 환자들에게 식이를 설명할 때 늘 하는 말이 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신선한 식재료를 사서 집에서 예전 방식으로 해 먹는 음식은 대부분 괜찮습니다." 이 말은 크론병 환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할머니 세대가 해주시던 잡곡밥에 된장찌개, 나물 반찬, 생선구이.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발효식품이 포함되어 있으며 가공식품이 거의 없는 식단이다. 그 시절 사람들이 먹던 음식이 장에 나쁘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가, 그때는 크론병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어도 된다. 탄산음료와 단 음료부터 줄이고, 가공 스낵 대신 과일을 놓아두고, 배달 앱을 열기 전에 냉장고를 한번 열어보는 것. 그것이 시작이다. 크론병이라는 질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분명하다.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면역과 건강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환경 요인이다.
Copyright ⓒ 헬스위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