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한국 현대미술의 가장 강력한 언어 가운데 하나인 영상예술이 유럽 한복판, 폴란드 바르샤바를 정조준한다. 국립현대미술관(MMCA)과 폴란드 바르샤바현대미술관(MSN)이 오는 3월 27일부터 29일까지 바르샤바현대미술관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다: 한국영상 쇼케이스》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한국 비디오아트의 태동기부터 동시대 뉴미디어 최전선까지를 압축해 보여주는 대형 프로젝트로, 총 17명(팀)의 작가와 31점의 작품이 3일 동안 현지 관객과 만난다.
이번 쇼케이스는 단순한 해외 상영전이 아니다. 백남준 이후 한국이 축적해온 비디오아트의 역사, 그리고 오늘날 AI·VR·게임·퍼포먼스로 뻗어나간 확장된 영상예술의 흐름을 유럽 공공미술관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자리다. 한국 현대미술이 더 이상 회화나 조각 중심의 소개를 넘어, 가장 첨예하고 가장 동시대적인 매체 언어로 세계 미술계와 정면 승부에 나서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행사는 바르샤바현대미술관의 영화관 키노(KINOMUZEUM), 다목적 공간 아고라(Agora), 전시실 등에서 펼쳐진다. 구성은 3일간 6개 프로그램. 국립현대미술관의 뉴미디어 소장품을 중심으로 《젊은 모색》, 《올해의 작가상》 등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플랫폼에서 검증된 작품들이 대거 포함됐다. 여기에 권하윤의 VR영화 <489년>(2015), 송주원의 1대1 퍼포먼스 <걷는 몸>(2023)까지 더해지며, 스크린 상영을 넘어 몸과 공간, 감각의 차원까지 확장된 예술 경험을 예고한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 비디오아트의 ‘뿌리’를 정면에 세운 점이다. 프로그램 1 ‘한국 비디오아트의 초기작 I’에서는 박현기의 <무제>(1980), 이강소의 <페인팅-78-1>(1977)을 비롯해 곽덕준, 김구림 등의 작업이 소개된다. 사진과 비디오, 퍼포먼스의 경계를 흔들며 새로운 예술 언어를 만들었던 1960~70년대의 급진적 실험들이 바르샤바에서 다시 호출되는 것이다. 이는 한국 영상예술이 하루아침에 등장한 흐름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문제의식과 실험의 계보 위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프로그램 2 ‘한국 비디오아트의 초기작 Ⅱ: 김순기’ 역시 강한 인상을 남긴다. 1970년대부터 공공장소에서 퍼포먼스와 비디오를 선보인 김순기의 대표작 <조형상황 I-III>(1971~74)을 포함한 주요 작품 5점이 상영된다. 한 작가의 실천을 통해 한국 비디오아트의 초창기 정신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는 구성은 이번 쇼케이스의 밀도를 한층 높인다.
동시대 프로그램으로 넘어가면 무게감은 더욱 커진다. 프로그램 3 ‘동시대의 화두들-역사, 자연, 국가’는 권혜원의 <투어 머신>(2013), 이끼바위쿠르르의 <해초 이야기>(2022), 권동현&권세중, 권하윤 등의 작업을 통해 국가의 공식 서사에 가려진 기억과 존재를 다시 불러낸다. 지워진 역사, 밀려난 삶, 보이지 않던 풍경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이번 쇼케이스의 제목과도 정확히 맞물린다. 한국 작가들은 여기서 국가와 역사,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첨예한 정치적·감각적 질문의 장으로 바꿔낸다.
프로그램 4 ‘동시대의 화두들-자본주의와 노동’은 차재민의 작업을 앞세워 오늘의 사회를 더 깊고 느리게 응시하게 만든다. <미궁과 크로마키>(2013), <네임리스 신드롬>(2022)은 자본주의가 시스템 밖으로 밀어내거나 보이지 않게 만든 노동, 돌봄, 질병의 문제를 집요하게 붙든다.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 시대에 오히려 천천히 보게 만드는 힘, 바로 그것이 한국 동시대 영상예술의 미덕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대중적 감각과 기술적 감수성을 정면으로 끌어안은 프로그램 5도 강렬하다. ‘동시대의 화두들-대중문화, 게임, 뉴미디어’에서는 정여름의 <그리어아이, 주둔하는 신>(2022), 김아영의 <알 마터 플롯 1991>(2025)와 <딜리버리 댄서의 구>(2023), 야광의 <다크라이드>(2025)가 소개된다. 애니메이션과 게임, 대중 시각문화라는 익숙한 문법을 빌려오되, 이를 사회 비판과 성찰, 저항의 언어로 전환하는 작업들이다. 친숙한 화면 안에서 전혀 다른 질문을 터뜨리는 이 작품들은 한국 뉴미디어아트가 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지 단박에 설명해준다.
프로그램 6 ‘동시대의 화두들-생태, 기술, 공동체’는 지금 이 시대의 가장 뜨거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언메이크랩의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2023), <뉴 빌리지>(2025), 렉처 퍼포먼스 <기계의 우화>(2025)는 인공지능과 성장 담론, 공동체와 생태의 균열을 탐색한다. 기술을 단순한 발전의 상징이 아니라, 집단적 욕망과 불안이 투사되는 거울로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동시대적이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 영상예술이 기술 친화적이면서도 기술 낙관주의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번 행사의 또 다른 핵심은 ‘직접 체험하는 예술’이다. 권하윤의 VR영화 <489년>(2015)은 관객을 DMZ의 상상적 풍경 안으로 끌어들인다. 실제로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을 VR로 재구성함으로써 분단의 현실과 기억의 지형을 새롭게 체감하게 한다. 송주원의 퍼포먼스 <걷는 몸>(2023)은 더 급진적이다. 작가와 관객이 등을 맞대고 20여 분간 전시실을 걷는 이 1대1 퍼포먼스는 ‘본다’는 행위를 몸의 감각으로 전환하며, 미술관 감상의 익숙한 질서를 뒤집는다. 단순한 관람을 넘어 감각 전체를 흔드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현지 관객의 반응이 주목된다.
연계 프로그램 역시 촘촘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이수정 학예연구사와 바르샤바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세바스티안 치호츠키, 쿠바 뎁친스키가 참여하는 작가와의 대화, 권하윤 작가의 워크숍 등이 함께 열린다. 즉 이번 쇼케이스는 작품만 보내는 행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큐레이터, 작가, 연구자, 현지 관객이 직접 연결되며 한국과 폴란드 사이의 예술적 번역과 교류가 실질적으로 이뤄지는 플랫폼이다.
폴란드 아담 미츠키에비츠 문화원 올가 비소츠카 원장은 이번 행사가 폴란드와 한국의 문화적 관계가 예술가와 기관 간의 의미 있는 교류를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번 쇼케이스가 폴란드 관객에게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작품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양국 문화 공동체 간 대화의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함께 밝혔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도 이번 행사의 의미를 분명히 했다. 그는 한국 비디오아트의 역사와 동시대 뉴미디어 작품을 폴란드 관객에게 소개하게 되어 기쁘다며, 이번 프로그램이 국립현대미술관과 바르샤바현대미술관 교류의 첫 시작이자 향후 장기적인 문화 협력의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다: 한국영상 쇼케이스》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국 영상예술은 이제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실험이 아니다. 초기 비디오아트의 급진성에서 출발해 VR, 퍼포먼스, 게임, AI 담론으로 이어지는 동시대적 확장성까지, 한국 작가들은 지금 세계가 가장 주목하는 질문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밀도 있게 풀어내고 있다.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이번 3일은 단순한 국제교류 일정이 아니다. 한국 현대미술이 유럽의 공공미술관에서 어떤 깊이와 파급력으로 읽힐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결정적 장면이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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