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1978년 첫 출간된 테벨라이트의 고전, 처음 국내 번역 출간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8년 독일에선 좌파 혁명단체들의 봉기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우익 민병대 '자유군단'(Freikorps)이 조직됐다. 전쟁 후에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퇴역 군인과 극우 청년 등이 주축이 된 자유군단은 1919∼1920년 스파르타쿠스 연맹 봉기나 '붉은 군대' 봉기 등을 진압하는 데 동원됐다. 공산주의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를 잔인하게 살해한 것도 그들이었다.
전후 혼란이 잦아들고,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자유군단은 해산했지만, 이들 중 일부는 나치 돌격대나 친위대로 흡수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훗날 독일 젊은 학자 클라우스 테벨라이트(1942∼)는 이 자유군단 소속 군인 중 7명의 남성에게 돋보기를 갖다 댔다. 이들이 남긴 자서전, 체험담, 이들을 다룬 소설 등을 토대로 언어와 행적을 추적해 이들의 의식·무의식 속에서 폭력적인 남성성과 파시즘의 기원을 파헤치려 한 것이다.
독창적이면서도 방대한 연구의 결과물로 1977∼1978년 나온 책 '남성 판타지'가 출간 50년 가까이 만에 국내서도 번역 출간됐다.
테벨라이트의 박사 학위 논문 '자유군단 문학 : 독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 1918-1923'을 확장해 나온 이 책은 이미 영어, 불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돼 전 세계에 소개돼 파시즘·나치즘 연구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저자는 파시즘을 단순한 정치 이념으로 보지 않고, 내면으로부터 발현된 무언가로 본다. "살인을 통해서 자기 생식과 자기 보존을 이루려는 강박이 파시스트 운동의 핵심"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강박을 만들어낸 심리적 기원을 파헤치기 위해서 파시스트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해 갖는 인식이나 여성과 맺는 관계에 특히 주목한다.
저자는 군인들의 텍스트에서 여성과 관련한 언급에 담긴 "양면적인 정서", 즉 "강렬한 관심과 냉정한 무관심, 공격성과 숭배, 증오, 공포, 소외와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부분에 흥미를 느껴 분석을 시작했다고 했다.
이들은 여성을 '장한 어머니'나 희생적인 간호사와 같은 무해하고 순결한 이미지와 남성성을 위협하는 여전사나 창녀와 같은 이미지로 극명하게 나누고 이분법적인 환상을 갖는다.
남성을 거세하는 여성성에 대해 느끼는 공포, 그리고 자아의 파편화와 붕괴를 막기 위한 몸부림은 폭력적인 파시즘으로 이어진다.
반세기 전에 쓰였지만 이 책의 통찰력은 지금도 매우 유효하다. 지구촌 곳곳에서 극우 정치세력이 부상하고, 여성혐오 등을 기반으로 한 극단적인 폭력이 계속 발생하면서 테벨라이트의 분석은 끊임없이 소환된다.
인터넷 등의 발달 속에 "구식 우파가 최신 기술을 만나" 파시즘 세력은 오히려 더 수면 위로 올라왔다.
2019년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최근 사회 문제가 된 '인셀'(Involuntary Celibate·비자발적 순결) 운동이나 네오 나치, 테러 범죄 등도 언급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남성 테러리즘 활동은 중심에는 은폐된 혹은 노골적인 여성혐오가 날뛰고 있다. 이들 '운동'은 인터넷을 통해 세력을 확대한다. 예전에는 남들 눈을 피해 사이비 종파처럼 몰래 회합하던 이들이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적 영향력을 얻고 있다."
독일어판 원서가 1천280쪽. 한글판은 1천500쪽 가까이에 달하는 그야말로 '벽돌책'인 데다 학술 논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을 수 있지만, 풍부한 시각 자료가 곁들여지고, 무겁지 않은 문장으로 쓰여 한 번 탐독에 도전해볼 만하다.
김정은 옮김. 글항아리. 1천464쪽.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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