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buy)는>
|
본격적인 이사와 혼수 시즌이 시작되는 3월, 2030 세대의 가전제품 구매 목록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된다. 과거 거실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대형 TV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거나 아예 장바구니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 빈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150만원을 훌쩍 넘기는 최고급 올인원 로봇청소기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팍팍한 고물가 시대에, 1인 가구와 신혼부부 가릴 것 없이 이 비싼 기계를 가장 먼저 결제하는 기이한 소비가 유통가의 메가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국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2일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가정용 청소 로봇 출하량은 약 3272만대로 전년 대비 20.1% 증가했다. 이 중 로봇청소기 제품군 출하량은 17.1% 늘어나며 시장 성장을 주도했다. 빗자루와 진공청소기를 쥐고 직접 집안을 누비던 시대가 저물고, 청소라는 가사 노동 자체를 완벽하게 기계에 외주화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
150만원이라는 거금을 흔쾌히 긁는 2030 세대의 셈법을 관통하는 핵심은 역시 시간의 가성비, 즉 시성비다. 퇴근 후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30분 동안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를 빠는 노동의 고통을 생각해 보라. 이 시간을 최저시급으로 환산하고, 그 시간에 푹 쉬면서 내일의 업무를 준비하거나 자기계발을 하는 기회비용까지 따져보면 답은 명확해진다. 150만원은 단순히 먼지를 빨아들이는 기계값이 아니다. 내가 온전히 누려야 할 퇴근 후의 소중한 휴식 시간과 쾌적한 일상을 확정적으로 사들이는 가장 저렴하고 확실한 투자금인 셈이다.
특히 맞벌이 부부에게 로봇청소기는 가전제품을 넘어 가정의 평화를 수호하는 든든한 중재자 역할을 한다. 오늘 저녁 누가 청소기를 돌릴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미묘한 눈치싸움과 감정 소모는 부부 싸움의 가장 흔한 도화선이다. 이 지긋지긋한 가사 분담 스트레스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면 150만원은 결코 아까운 돈이 아니다. 청소 당번을 두고 다투다 기분이 상해 비싼 배달 음식을 시켜 먹거나 주말 내내 냉전 상태로 지내는 손실을 고려하면, 초기 자본을 든든하게 투자해 가사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압도적으로 남는 장사다.
퇴근 후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도파민을 충전하는 동안, 나를 대신해 거실 바닥을 쓸고 닦고 스스로 걸레까지 빨아 말리는 150만원짜리 원반형 기계. 이 녀석이야말로 팍팍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퇴근 시간과 부부의 평화를 동시에 지켜주는 가장 충직한 보디가드다. 텅 빈 거실에 대형 TV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내 소중한 저녁 시간을 먼지구덩이에서 구원해 줄 이모님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는 것이 2030의 진짜 현실이다. 오늘도 바닥에 널브러진 스마트폰 충전기 선을 황급히 치우며 이모님의 출근길을 경건하게 닦아놓는 모든 직장인들의 평화로운 저녁을 응원한다.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