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1592년 임진년, 가토 기요마사 선봉군의 조총 부대장으로 조선 땅을 밟은 21세의 사무라이 사야가(沙也可)는 왜군의 만행을 목격하고는 "조선의 예의와 문물이 아름다워 그 백성이 되고자 한다"며 휘하 500여 명과 함께 귀순했다.
조선군에 조총 기술을 전수하며 왜군 격퇴에 큰 공을 세운 그는 도원수 권율의 주청으로 선조에게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육군 대장급인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다.
그는 진주 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해 대구 달성군 가창면에 정착했다. 5남 1녀를 낳은 김충선은 "사슴과 벗하며 살겠다" 하여 거처를 '우록(友鹿)'이라 이름 짓고 생을 마쳤다. 현재 우록리에는 녹동서원과 한일우호관이 들어서 그의 발자취를 기리고 있다.
▷ 그로부터 3세기가 흐른 1895년 을미년, 조선군 훈련대 제3대대장이었던 개화파 우범선은 일본과 결탁,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 이듬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해 친러 내각을 세우자,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은 도쿄에서 일본인 사카이 나카(酒井ナカ)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세계적 과학자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 한국명 우장춘이다. 도쿄대 입학 전에 일찌감치 천재성을 드러낸 우장춘은 서로 다른 종의 교배로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종의 합성' 이론을 세계 최초로 제시하며 현대 유전학의 새 장을 열었다.
그는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됐지만, 2차 대전이 끝나자 일본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택했다. 국모 시해범의 아들이라는 낙인을 안은 채 기아에 허덕이던 고국의 농업을 일으키고 한국 농학의 아버지로 남았다.
일본은 조선 왕실의 핏줄도 바꿨다. 고종의 아들이자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은 불과 10세의 나이에 인질이나 다름없는 일본 유학길에 올라야 했다. 내선일체의 선전 도구로 전락한 그는 일본 왕실의 마사코 여왕(이방자 여사)과 정략결혼을 했고, 일본군 장성의 제복을 입은 채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8·15 해방 후 이은은 귀국을 간절히 바랐으나 이승만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63년 박정희의 도움으로 겨우 고국 땅을 밟았지만, 귀국전 뇌일혈로 인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그렇지만, 부인 이방자 여사는 일본 대신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남은 생을 바쳤다. 이 여사는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내가 묻혀야 할 조국, 이 땅을 나의 조국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남기고 한국에 뼈를 묻었다.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의 혼인 건수가 2024년 기준 1,176건으로 전년 대비 40% 급증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경제적 조건과 결혼 문화의 무게에 짓눌린 한국 남성들이 상대적으로 검소하고 배려심 깊은 일본 여성에게서 정서적 안식처를 찾는 현상이라 분석하기도 한다.
일본이라면 반감부터 드는 기성세대로서는 격세지감을 느낄 법한 변화다. '한남·일녀'라는 신조어로 대변되는 결혼 문화의 변화가 낯설고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전쟁과 비극이 결혼을 강요한 과거 프레임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두 나라 청년들의 자발적 선택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두 나라가 미래로 나아가는 단단한 주춧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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