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에게 내 돌봄이 필요한 시간이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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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에게 내 돌봄이 필요한 시간이 가까워진다

엘르 2026-03-20 07:28:25 신고

오랜만에 가족 넷만 모인 자리였다.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엄마의 최근 건강검진 결과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 혈당이 높으니 나가서 걸어야 한다, 매일 집에만 있고 남과 대화를 안 하니 자꾸 단어를 잊어버리는 거다, 안 쓰는 물건 좀 버리고 공간을 만들어서 스트레칭이라도 해라…. 두 딸의 잔소리가 꼬리를 물던 중 운전석의 아빠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중에 아빠 먼저 가고 나면 엄마는 누가 돌봐 줄래?” 쉴 새 없이 진동하던 공기가 그대로 멈췄다. 엄마도, 언니도, 나도 입을 벌린 채 얼어붙었다. 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셋, 둘, 하나. “내가 하지 뭐.”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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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거치지 않은 말이 심장에서 바로 튀어나왔다. 아까보다 조금 짧은 정적이 흐른 뒤, 안도감 섞인 웃음이 공기를 녹였다. 아빠는 약간 머쓱한 기색으로 얼른 덧붙였다. “나는 혼자서도 잘 지낼 테니까 들여다볼 필요 없지만 만약 엄마가 혼자 남게 되면 옆에서 좀 챙겨 주거라.”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한 내가 ‘진짜 어른’이 되는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적 있다. 내 삶에 늘 나보다 어른이었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세상 겁날 게 없는 척, 독립적인 척하면서도 여차하면 달려가 숨고 응석 부릴 구석이 있는 것처럼 든든했다. 하지만 아빠의 말은 내가 이제 두 가지 과제와 직면할 때가 됐다는 의미였다. 바로 ‘죽음’과 ‘돌봄’이다.


부모님에게 내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은 10년 전, 엄마에게 카카오톡을 가르쳐 주면서다. 내겐 숨 쉬듯 쉽고 간단한 걸 몇 번이나 다시 묻는 엄마에게 온갖 짜증과 생색을 내고 나서 알았다. 엄마는 가계부 공책에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는 데 필요한 모든 단계를 하나하나 적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익히고 있었다. 내가 가전제품도 못 다루고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른다고 혀를 차던 아빠는 디자인이 바뀐 로션 뚜껑을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당황했다.


세상이 바뀌는 속도가 오래 살아온 사람을 추월해 가는 동안 나는 부모님의 백신 접종 예약과 아이허브 직구, 스마트폰 교체를 도왔고, 사기에 가까운 부동산 계약과 보이스 피싱, 온갖 가짜 뉴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조금 번거롭지만 나도 제법 쓸모 있는 어른임을 인정받나 싶어 으쓱할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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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돌봄이라니, 선인장 하나도 키울 마음 없이 살아온 내가 그렇게 경계도 없고, 끝도 없고, 언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 운전도 살림도 못하고, 참을성도 없어서 엄마가 어깨 수술을 했을 때 고작 머리 한 번 감겨주면서 있는 짜증 없는 짜증 다 냈던 내가 과연 그렇게 ‘진짜 어른’ 역할을 맡아도 될까?


걱정과 함께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내가 하겠다고 호언장담한 뒤였다. 우선 두 아이를 키우며 다른 지역에 사는 언니보다 아이 없이 부모님과 같은 동네에 사는 내가 훨씬 자유롭다. 결혼하지 않았거나 아이가 없는 딸이 ‘자연스럽게’ 부모에 대한 돌봄 책임을 지는 구조를 비판해 왔지만, 막상 내 일이 되자 다른 돌볼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자신이 아니라 엄마를 돌봐 달라고 부탁한 아빠, 언젠가 자신을 연명 치료해야 한다면 2주를 넘기지 말라고 당부한 엄마는 우리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스스로 일상을 꾸려 나갈 수 없게 될 날이 다가온다며 불안해하는 부모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맡기로 한 역할이 대수롭지 않은 듯 처신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막연한 두려움을 마음속 깊숙이 묻어둔 지 얼마 뒤,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일하는 딸〉의 부제는 ‘일하면서 부모를 돌보는 여성들을 위한 안내서’다. 직장에 다니며 두 아이를 키우던 리즈 오도넬은 어머니의 암 선고, 아버지의 치매 선고를 동시에 받으며 본격적인 돌봄 제공자 역할을 맡았다. 부모의 돌봄을 받다가 부모를 돌봐야 하는 역할 전환에도, 기둥 같던 부모님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저 멍청하게 바라봐야 하는 상황에도 준비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시행착오 경험과 깨달음을 이 책에 담았다.


돌봄 과정에서 발생하는 죄책감을 처리하는 방법, 형제자매와의 관계에서 주의할 점, 부모님을 시설로 이주시킬 때의 마음가짐 등 구체적 지침 사이에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용변 받아내기’에 대한 내용도 있다. 물론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 “엿같았어”겠지만 돌봄이란 이토록 인간의 몸에 밀착된 일이고 도무지 계획대로 되지 않는 하루하루임을 따라가면서 잔뜩 긴장했던 마음은 오히려 느슨해졌다. ‘그래, 내가 하지 뭐.’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되든, 지금은 일단 엄마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좀 걸어야지. 걷다가 카페가 보이면 들어가서 키오스크 사용법도 가르쳐 줘야지.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펴냈다. 뉴스레터 ‘없는 생활’의 발신자. 늘 행복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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