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한민하 기자] 수입 생활용품의 원산지를 제조 국가명이 아닌 생소한 도시 이름으로 바꿔 유통하는 ‘우회적 표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중국산’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심리적 저항을 낮추기 위해 국가명을 지워 지명 뒤로 숨는 ‘꼼수형’ 마케팅의 한 유형으로, 소비자의 알 권리 침해는 물론 필요 정보에 대한 오인 가능성과 유통 질서 왜곡 등 각종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19일 본지 취재에 따르면 일부 생활용품의 원산지를 생산 국가가 아닌 도시명을 표기한 사례가 소비자 제보를 통해 확인됐다. 예를 들어 ‘made in shenzhen(메이드 인 선전)’과 같은 방식으로, 국가명인 ‘China(중국)’를 명시하지 않고 도시 이름을 표기하는 식으로 제품이 유통되고 있다. 표기 자체는 존재하지만 ‘국가’ 단위 정보를 숨긴 채 낯선 지명을 표기, 원산지에 대한 직관적 판단을 사실상 차단하는 방식이다.
중국산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품질·안전성 우려를 고려하면 국가명을 배제한 채 도시명만 부각하는 방식은 해당 브랜드의 의도적 행위로 해석될 여지가 있고, 또 일부 브랜드의 경우 실제 우회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같은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생산 국가를 표기하지 않는 방식은 현행 원산지 표시 기준에도 배치되는 행위다. 관세청 대외무역 관리규정에 따르면 원산지는 소비자가 즉각 인지할 수 있는 ‘국가명’으로 표시해야 하며, ‘Made in Korea(메이드 인 코리아)’처럼 국명을 명확히 드러내는 방식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도시명이나 지역명만으로 원산지를 표시해 소비자가 생산국을 쉽게 알 수 없게 할 경우 부적정 표시에 해당한다는 것으로, 생소한 도시명이나 모호한 병기 역시 유사한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관세청 관계자는 “원산지 표시 기준은 국가명이 원칙”이라며 “대외무역법상으로 적정한 원산지 표시 방법이 아니”라며 “브랜드명이나 제조사명을 결합한 형태로 표기할 경우 소비자가 해당 제품의 생산국을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의 핵심은 원산지 표기가 ‘정보 제공’이 아닌 목적성이 뚜렷한 ‘정보 설계’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원산지는 소비자가 제품의 안전성, 품질, 가격 적정성을 판단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다. 그러나 국가명이 빠지고 도시명만 남게 되면 소비자는 기존의 판단 기준을 적용하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브랜드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더 크게 의존하게 될 수 있다.
특히 업계에서는 이 같은 표기 방식이 소비자 인식과 맞물린 전략일 가능성에 주목한다. 일부 제품이 프리미엄 이미지를 내세우며 높은 가격대를 형성 중인 가운데 중국산 제품에 대한 품질·안전성 우려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명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은 소비자의 심리적 저항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꼼수’라는 지적이다.
동일한 생산국 제품이라도 원산지 표기 방식에 따라 가격 수용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가격 전략과 연결된 행위라는 것이다.
정부 당국도 몇몇 브랜드의 원산지 표기 방식에 대해 “당초 제도 도입 취지와도 어긋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관세청은 원산지 표시의 기본 원칙으로 ‘최종 구매자가 쉽게 발견하고, 혼동 없이 판독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단순 표기 여부가 아니라 소비자가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인지가 기준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shenzhen’과 같은 지명은 해당 지역에 대한 사전 인식이 없는 소비자에게는 생산국을 바로 떠올리기 어렵고, 브랜드명과 결합될 경우 원산지 정보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들다. 결과적으로 법이 요구하는 ‘직관적 인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문제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비자 후기 등에서도 확산하고 있다. “어디 제품인지 헷갈린다”, “중국산을 숨기려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이어지면서 원산지 표기 방식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당국도 원산지 오인 표시를 주요 단속 대상으로 보고 있다. 관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는 국가명을 숨기거나 지명으로 대체하는 방식, ‘상세참조’ 등으로 정보를 뒤로 미루는 사례를 소비자 기만 행위로 보고 단속을 벌여왔다.
업계에 따르면 이탈리아산 자전거용 헬멧 현품에 ‘메이드 인 이탈리아(MADE IN ITALY)’로 표기한 뒤, 별도의 종이택에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를 병기해 원산지를 오인하도록 한 사례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잘못된 원산지 표기 방식이 확산함에 따라 시장 전반의 정보 질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원산지를 명확히 공개하는 사업자와 그렇지 않은 사업자 간 형평성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소비자들이 불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구매 결정을 내리게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허경옥 성신여대 소비자산업학과 교수는 “수입 제품의 경우 원산지는 국가명을 기준으로 표시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도시명만으로 표기하는 방식은 적정한 표시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수입 제품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생산국 정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경우 유통업체 역시 일정 부분 도의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 모든 것을 법으로 규제하기는 한계가 있는 만큼 소비자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며 “이 같은 인식이 확산돼야 유사한 꼼수도 줄어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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