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하는 여자들] 설재인 소설가, 12년간 복싱을 했습니다 |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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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여자들] 설재인 소설가, 12년간 복싱을 했습니다 | 예스24

채널예스 2026-03-18 00:00:00 신고

특집 인터뷰 [운동하는 여자들]

유독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될 무렵, 글을 쓰고 운동을 하는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운동이 작업과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설재인 소설가, 박연준 시인, 정세희 전문의와 함께 운동과 작업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언젠가 꼭 한 번 설재인 작가와 복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전 인터뷰에서 “만약 평행 우주에서 작가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을 때 그가 “실업팀 전업 복싱 선수”라고 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를 사로잡은 복싱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또 다른 궁금증도 있었습니다. 최근 5년간 설재인 작가는 『사뭇 강펀치』, 『범람주의보』, 『예술에 관한 살인적 농담』 등 공저를 포함해 28권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무서울 만큼의 성실함과 몰입력은 어디서 비롯될까요? 복싱에 미쳐 있고 글쓰기에 푹 빠져 있는 설재인 작가와 대화를 나누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목고 수학 교사였던 그가 전업 작가가 되기 전, 퇴근길에 우연히 창문 너머로 복싱장의 벨 소리를 들었을 때 이미 어떤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어떻게 복싱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외고에서 수학 교사 생활을 하던 때였어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교사 생활과 다르게 매일 격무와 야근에 시달렸어요. 어느 날 밤에 녹초가 돼서 퇴근하는데 머리 위로 땡! 하고 타이머 울리는 소리가 나서 올려다봤는데 3층에 복싱장이 있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복싱장에 올라가 봤는데 그 시간에 운동하고 있는 직장인들이 되게 많더라고요. 큰 충격을 받았죠. 나 빼고 다 갓생을 사는구나! 당시에 운동할 시간이 없었는데도, 일에 파묻혀 지내며 저를 위한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던 터라 그날 바로 복싱장에 등록하고 당일에 운동을 시작했어요. 

 

행동파이시군요! 복싱이 처음부터 잘 맞으셨나요?

제가 원래 좀 충동적이에요. 사실 복싱을 하기 전에 운동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어요. 항상 스스로 운동을 못 한다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는데 처음 온 회원들한테는 잘한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성인이 되면 칭찬받을 일이 점점 많지 않잖아요? 그래서 재밌었던 것 같아요. 또 복싱을 시작했다가 많이들 그만두는 이유가 기본 동작을 계속 반복해서 시키기 때문이거든요. 그때까지 잘 몰랐는데 제가 단순 반복 동작을 좋아하는 사람이더라고요. 

 

그 이후로 12년간 복싱을 해오셨죠. “좋은 글의 절반은 경험이 만든다”고 인터뷰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복싱이 작업이나 일상에 미친 영향이 궁금해요.

일단 허리가 안 아프고요.(웃음) 반복된 훈련을 좋아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게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저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 알게 됐어요. 제가 관장님께 그런 얘기를 했어요. 복싱장에 오기 전까지 전 금수였는데 운동을 시작하고 인간이 되었다고요. 제가 성격도 급하고 충동적이기도 하고 인내심이 별로 없었거든요. 시간이 많이 지난 뒤 말씀해 주셨는데 관장님도 제가 처음 왔을 때 어떻게 저렇게 몸치에 성격이 급할 수 있나 하셨대요.(웃음)


그런데 복싱을 하면서 그게 어떤 분야이든 ㅡ설령 잘 못 하는 일일지라도ㅡ 반복적으로 훈련하면 언젠가는 변화가 생긴다는 믿음이 제 안에 생겼어요. 단기간에 무언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배우기도 했고요. 이제는 무언가를 시작하면 그냥 매일 오래 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죠. 그런데 운은 그만두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에게 오더라고요. 사실 글도 비슷한 것 같아요.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는 운이 닿는 때가 오겠지, 그때까지 그냥 할 일을 열심히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촬영에 가지고 온 헤드기어와 글로브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사실 복싱을 오래 할 수 있었던 건 관장님 덕분이에요. 12년 간 한 체육관만 다녔고 지금은 이사를 가서 편도로 1시간이 걸리는데 주 6일 체육관에 가요. 관장님은 제가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어른 중 한 분입니다. 관장님께서 전국의 프로복싱 대회를 다니면서 사비로 상과 상금을 주세요.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실업팀 복서랑 프로 복서가 달라요. 프로 복서는 말 그대로 대전료를 받는데, 우리나라에서 복싱 대회 티켓이 잘 팔릴 리가 없잖아요. 상도 본인 이름이 아니라 과거에 세계 챔피언을 하셨던 체육관 사범님 이름으로 만드셨어요. 그 상이 올해로 벌써 100회가 됐습니다. 그만큼 자기 일을 사랑하시는 분이에요.


오늘 가져온 헤드기어와 글로브는 복싱을 시작한 지 10년쯤 됐을 때 관장님께서 저한테는 따로 말씀을 안 하시고 일본의 하이엔드 브랜드에 커스텀 주문을 해서 만들어 주신 거예요. 그런데 거기가 복싱계에서 가장 좋은 브랜드라 전 세계에서 주문이 들어오다 보니 제작에 몇 년이 걸릴지 미리 알려줄 수 없다고 했대요. 관장님께서 그래도 상관없다고 하셨다는데 그 이유가 저에게 정말 큰 선물이었어요. 몇 년이 걸리던 얘는 계속 여기 다닐 거라고. 잊을 수 없는 말이죠. 실제로 1년 반 만에 배송이 왔습니다.

 

실제로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그만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운동하며 만난 사람들이라고 하셨어요.

저는 초중고 때 집 학교만 다니며 공부를 열심히 했었어요. 대학 가서도 같은 대학 온 애들만 만나잖아요. 선생님이 되고 나서는 선생님들을 만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볼 일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체육관에 가니까 다양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 거예요. 편협한 제 사고 안에서만 생각해 왔던 삶 바깥을 보게 된 거죠. 다양한 형태의 삶이 가능하다는 걸 체육관에 와서 처음 경험하게 되면서 학교를 나와도 어떻게든 살아갈 길이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각 운동을 통해 연마되는 능력이 종목마다 다를 것 같아요. 복싱을 통해 길러진 능력이 있다면요?

담력이요.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담력이 늘어요.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는 게 예전만큼 두렵지 않아졌어요. 복싱을 하기 전에는 혼자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거든요. 어떻게 가는지도 잘 몰랐고. 그런데 운동을 시작하고는 혼자서도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무에타이를 배워보고 싶어서 24년에는 혼자 태국에서 두 달 정도 지냈어요.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서 합숙소를 운영하면서 선수도 육성하는 체육관을 찾아갔어요. 시골에 있는 체육관이라 아침 운동으로 러닝을 하다가 들개들한테 쫓기기도 하고. 되게 기억에 남는 경험이었어요. 또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하는 건데, 작품에 악플이 달려도 타격감이 그렇게 크진 않아요. 실제로 링 위에서 맞는 게 훨씬 아프기 때문에.(웃음) 

 

한편으로 실력이 무한히 계속 늘 수는 없잖아요. 무엇이든 처음 배울 때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이후에는 성장세가 둔화되거나 정체기가 오기도 하죠.

그렇죠. 심지어 전 운동신경이 없으니까 더 그래요. 그런데 저한테 복싱은 이제 밥 먹는 거랑 비슷해요. 살아가기 위해 밥을 먹는 게 당연한 것처럼요. 맨날 맛있는 음식만 먹지 않잖아요. 저에겐 복싱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싱과 관련된 책이나 영화 중 좋아하는 작품이 있으실까요?

영화는 미아케 쇼 감독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 아마 그 영화를 보고 저처럼 많이 운 사람은 없을 거예요. 목구멍이 아플 때까지 울었거든요. 이 얘기를 하면 다들 어느 장면에서 울었냐고 물어봐요.(웃음) 재개발 때문에 체육관 문을 닫게 되는 설정이라 저는 거의 처음부터 울었어요. 체육관이 없는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너무 감정이입이 됐거든요. 제가 운 거랑 별개로 좋은 영화였고 역시 일본이 복싱 강국이라 배우분의 복싱 연기도 좋았습니다.


최근에 민음사에서 나온 소설 『헤드샷』도 기억에 남아요. 보통 스포츠 중에서도 복싱이 교과서적인 의미의 성장 서사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헤드샷』에는 그런 게 없어서 좋았어요. 여자 청소년 복싱 대회 토너먼트 이야기인데, 등장 인물들이 이걸 통해서 성장한다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된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링 위에 오른 사람 하나하나의 삶을 가감 없이 담백하게 보여주거든요. 청소년 시기에 뭔가를 죽어라 열심히 하면 그게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생각을 많이들 하는데, 결말에서 그게 아니라 인생에 여러 갈래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좋았습니다. 


복싱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 “경기 휘슬 이 울린 뒤 두 선수가 서로 수고했다고 인사하며 포옹할 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 순간이 지금도 제일 좋아요. 저는 스파링이든 경기든 시작 전에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상대방 주먹이 얼마나 아픈지도 알고, 링 위에 올라가면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그래서 휘슬이 울리면 이기든 지든 끝까지 버텼다는 사실 자체가 도파민이 돌고 행복해요. 아, 드디어 끝났구나 하고. 


상대방이랑 그전까지는 서로 죽일 것처럼 때렸는데 그게 폭력의 행위가 아니라 정당한 스포츠였다는 점이 저를 되게 고양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경기가 끝나고 서로 포옹하는 게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겨뤘다는 표현이기도 하고, 직전까지 얼마만큼 맞았든 간에 함께 운동하는 사람으로서 상대에게 호의를 표출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되게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해요. 

 

나에게 복싱은 ______ 이다”를 말씀해 주신다면?
이룰 수 없는 장래희망.(웃음) 저는 실업팀의 전업 복서분들이 너무 부러워요. 운동신경이 없어 평생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정말 열심히 할 자신이 있습니다. 작가랑 비교하면 우리나라 실업팀 복서들의 연봉이 괜찮은 편이기도 하고요. 저는 운동하는 게 너무 좋아서 하루에 다섯 시간, 여섯 시간씩 매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작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날이 오면 생활체육지도자의 길을 가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해요. 만약 언젠가 복싱장을 열게 되는 날이 온다면 무엇보다 기본기를 잘 가르치고 싶어요. “저기 가면 아무도 허세 안 부린다”고 말해지는 그런 곳이요.

 

복싱을 통해서 달성하고 싶은 목표라고 하면 좀 거창한 것 같고, 원하시는 모습이 있을까요.

농담 버전과 진담 버전이 있는데요. 제가 프로 라이센스가 있어요. 그래서 농담 버전은 데뷔전을 하는 것.(웃음) 진담 버전은 그냥 복싱을 계속하는 거예요. 체육관을 오래 다니다 보니 가끔 저를 선수라고 오해하시기도 하고 경기나 대회가 있냐고 묻기도 하세요. 그럼 전 아니라고, 그냥 하는 거라고 답하거든요. 그렇게 그냥 복싱을 계속 오래 하고 싶습니다.





설재인 작가의 책




『드림 라운드』

설재인 저 | 푸른숲주니어


밤 11시를 넘긴 늦은 밤, 환하게 불이 켜진 미원복싱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미원복싱 관장의 딸로 태어나 일곱 살 때부터 복싱을 시작했지만 뒤늦게 자신의 진짜 꿈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진 김온해, 복서라는 이루지 못한 꿈에 한을 품고 유령이 된 미원복싱 옆 새마음교회의 목사 문정호. 김온해와 문정호의 이야기를 오가며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현실적인 꿈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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