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다큐멘터리 PD이자 전 SBS 대표이사로 한국 방송사를 대표해온 박정훈이 신간 『태평양을 건너는 거북이 등에 낙엽이 떨어질 확률』에서 들고 나온 첫 문장이다. 제목 그대로, 태평양을 건너는 거북이 등에 낙엽이 떨어질 확률에 비유될 만큼 희박한 숫자에서 시작된 한 인간의 삶을, 그는 냉정한 통계가 아닌 ‘경외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간다.
저자는 자신의 출생 확률을 실제로 계산해 본다. 부모의 만남에서 수정·착상, 출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변수를 곱해 나온 숫자는 0.0000000000000000000633. 소수점 아래 19개의 0 뒤에 겨우 도달하는 값이다. 여기에 어머니로부터 “낙태약을 먹고도 떨어지지 않았던 아이가 너였다”는 고백이 더해지면서, 숫자는 통계를 넘어 하나의 서사로 바뀐다. 저자는 이 극단적인 희박함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새삼 각성하게 됐다”고 말한다. 다소 비상식적인 언행을 하는 사람을 만나도 “그 어려운 확률을 뚫고 태어난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며 덜 미워지게 됐다는 고백은, 숫자가 어떻게 태도와 시선을 바꾸는지 보여준다.
박정훈은 이 책에서 확률을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왔다는 사실을 가장 겸손하게 설명해 주는 언어”라고 정의한다. ‘만약 그때 낙태약이 통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존재’라는 상상을 통해, 그는 한 개인의 존재가 곧 그 사람에게는 우주의 존재와 같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태어난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만큼, 지금 이 순간 찍어가는 하루하루의 점(dot)들 역시 결코 가볍지 않다는 메시지다.
이 인식은 곧 인생을 바라보는 저자의 핵심 프레임인 ‘점과 카오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박정훈은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에서 언급한 “connecting the dots(점들을 연결하라)”를 끌어와 자신의 삶을 재구성한다. 대학 시절 아무 준비 없이 친구를 따라갔다가 합격한 언론고시, 그 기회를 열어준 친구 K의 갑작스러운 죽음, “자신이 기획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놈이 진짜 PD”라는 선배의 한마디에 모두가 선망하던 MBC를 박차고 신생 방송사 SBS로 옮긴 선택까지. 당시에는 무모하고 즉흥적인 점들처럼 보였던 사건들이, 수십 년이 흐른 뒤 돌아보니 하나의 정교한 3차원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인생을 “직선이 아닌 비선형”이라고 단언한다. 노력과 계획대로 흘러가는 방정식이 아니라, 환경과 사람, 조직, 윗사람의 성향, 타이밍, 운 등 수많은 외부 변수가 개입하는 카오스의 세계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이라는 후회형 질문 대신, “그 점이 미래의 어떤 점과 연결될 것인가?”라는 탐색형 질문으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한다. 점 하나하나가 ‘중첩된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어떤 점을 찍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 곡선이 그려진다는 사실을, 그는 40년 방송 인생의 구체적인 사례로 증명해 보인다.
이 책의 또 다른 축은 리더십이다. 한국 사회에서 임원이 될 확률 0.8%를 뚫고 방송사 사장 자리에 오른 그는, 자신의 성공을 “운과 주변의 도움” 덕분이라고 낮추면서도 그 운을 증명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결단의 순간들을 숨김없이 공개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역사 왜곡 논란으로 거센 비난을 받았던 드라마 ‘조선구마사’ 폐지 결정이다.
2회 방송 이후 시청자 항의가 폭발적으로 쏟아지던 밤, 그는 손실과 책임, 조직의 이해관계를 저울질하다가 “돈은 또 벌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방송의 본질은 시청자에게 있고, 시청자와 싸워 이기는 것은 방송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다음 날 회의실에서 그는 “시청자가 원치 않는 방송은 폐지하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수십억 원의 손실과 안팎의 반발을 감수한 결정이었다.
이 대목에서 드러나는 것은 ‘권한은 누리되 책임은 지지 않는’ 리더상과는 정반대의 초상이다. 그는 “어느 순간 결정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데, 그때 마음속에서 합에 이른 생각을 마지막으로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더해 최종 결단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결단의 배경에는 아내로부터 미리 받아 둔 이른바 ‘사표 면허’가 있었다. “사장이 된 기념으로 내가 원하는 순간 언제든지 사표를 낼 수 있는 면허를 달라”는 그의 요구에 아내가 동의하면서, 그는 언제든 자리를 내려놓을 준비가 된 상태로 조직을 이끌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 ‘사표 면허’ 덕분에 회장에게도 스스럼없이 직언할 수 있었고, 학연·지연을 배제한 인사를 단행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리더의 모든 의사결정에는 ‘숨은 가격표(Hidden Price)’가 붙어 있다고 강조한다. 겉으로 보이는 이익과 손실 뒤에, 조직문화와 신뢰, 개인의 양심과 같은 보이지 않는 비용과 대가가 따라붙는다는 뜻이다. 그 가격을 직시하는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가 보인다고 그는 말한다.
전문성의 함정에 대한 경고도 날카롭다. 예능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예능국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그는 첫 신규 프로그램 시사회에서 “내 눈에는 별로 재미없는데, 예능 PD들은 연신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때 그가 얻은 결론은 “전문성과 대중성은 반비례한다”는 문장이다. 생산자인 전문가 집단의 정서와 소비자의 감각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며, 그 간극을 자각하지 못하는 순간 콘텐츠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이 깨달음은 곧 그의 의사결정법으로 이어진다. 그는 중요한 사안일수록 ‘정·반·합’의 3단계 사고에 그치지 않고, 여기에 ‘제4의 시각’을 더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내린 1차 결론에 주변 사람들의 직언과 조언을 덧붙여 수정·보완하는 과정이다. 자아 비대증에 빠지기 쉬운 전문가와 리더에게, 이 ‘제4의 시각’은 자기 객관화를 가능하게 하는 안전장치라는 설명이다.
책에는 그가 연출한 대표 다큐멘터리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담겼다. 출산과 분만 문화를 바꾼 ‘생명의 기적’, 대한민국의 식탁과 환경 감수성을 뒤흔든 ‘잘 먹고 잘사는 법’과 ‘환경의 역습’ 등은 모두 거창한 공적 문제의식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필요에서 출발했다. 제왕절개로 태어난 딸의 아토피를 보며 느낀 죄책감이 ‘생명의 기적’을, 새집으로 이사한 뒤 가족이 겪은 각종 질환이 ‘환경의 역습’을 낳았다. “내가 아이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라는 개인적 자책과 궁금증이, 공적 의제를 던지는 사회적 콘텐츠로 확장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혼자 잘하는 영웅 신화’를 단호히 거부한다. 프로그램의 성공은 PD 한 명의 능력이 아니라, 스태프 개개인이 자신의 역량을 120%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드는 리더의 역할에서 나온다고 본다. 그 비결로 그는 “군림이 아닌 진심 어린 교감”을 꼽는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잘해야만, 그들이 가진 재능이 한계 이상으로 발휘된다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서 박정훈은 환갑날 홀로 산책하다 떠오른 한 문장을 ‘에피파니(깨달음)’로 제시한다. “세상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고, 그 이후에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 무기정학을 당했던 고교 시절, 친구의 죽음, 예상치 못한 기회와 좌절 등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사건 자체보다 그 이후의 선택이 결국 인생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좋은 일이 나쁜 결과로, 나쁜 일이 오히려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경험으로 전환된 것은 모두 ‘그다음 행동’에 달려 있었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만약 다시 20대의 자신에게 단 한 마디를 전할 수 있다면, 그는 이렇게 말하겠다고 적는다. “네가 무슨 일을 겪더라도 그다음 행동이 너의 인생을 만들어 줄 거야.” 이는 확률 0%에 가까운 탄생 이후, 또 다른 확률 0%에 가까운 선택들을 통해 지금의 자신이 만들어졌다는 책 전체의 메시지를 응축한 문장이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다시 확률의 언어로 돌아간다. 극도로 희박한 확률을 뚫고 태어난 ‘나’와 ‘당신’이 서로를 만날 확률은 그보다 더 낮다. 그런 존재들이 만나 서로를 미워하거나 해를 끼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돌아보면 자신의 인생은 결국 사람들과 맺은 인연의 총합이었으며, 그 인연 하나하나가 태평양을 건너는 거북이 등에 떨어진 낙엽처럼 기적에 가까운 사건이었다는 자각이다.
『태평양을 건너는 거북이 등에 낙엽이 떨어질 확률』은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이들에게는 이미 찍어 온 점들을 긍정하게 하는 위로를, 이제 막 첫 점을 찍기 시작한 청년들에게는 불확실성을 돌파할 용기와 사고법을 건넨다. 태어날 확률도, 여기까지 살아올 확률도,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있을 확률도 거의 0에 가까운 세계에서, 우리는 오늘 어떤 점을 찍을 것인가. 이 책은 그 질문을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독자에게 되돌려준다.
◆저자 - 박정훈
전 SBS 대표이사 사장. 1986년 MBC PD로 시작해 만 39년 넘게 다큐멘터리와 시사, 교양, 라디오, 편성, 예능, 드라마 책임자를 거치는 방송계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삶이 원하는 콘텐츠가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해 왔다.
〈그것이 알고 싶다〉 〈사랑의 징검다리〉 〈송지나의 취재파일〉 등을 제작, 우리 사회의 여러 단면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추적했고, 인간의 몸과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으로 〈육체와의 전쟁〉 〈아름다운 성〉 같은 다큐멘터리를 연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0년 3부작 다큐멘터리 〈생명의 기적〉을 통해 제왕절개와 출산 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고, 2002년 〈잘 먹고 잘사는 법〉으로 자연식 밥상과 웰빙 신드롬을 촉발했으며 책으로도 출판해 22만 부가 넘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2004년 3부작 〈환경의 역습〉에서는 ‘새집증후군’과 실내공기 오염, 중금속·농약 등 생활환경의 위험을 조명해 제도와 산업 전반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호주 시드니의 UTS(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에서 저널리즘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방송대상 대상을 포함, 한국방송대상 3회, 삼성언론상,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올해의 좋은 프로그램 대상, 방송프로듀서상, 국민포장 등 국내외 상을 30여 차례 수상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동안의 삶을 통해 우연과 선택, 터닝 포인트가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빚어내는지 탐구하며, 현실은 예측 가능한 공식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이 중첩된 ‘확률의 이야기’임을 발견해간다. 방송사 평사원에서 지상파 최장수 사장에 이르기까지, 극도로 낮은 확률을 뚫고 이어진 자신의 삶을 ‘운과 선택,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책임의 리더십’의 언어로 다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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