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사태가 격화되면서 걸프 지역 에너지·자원 기업들이 잇따라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하고 있다. 전쟁으로 주요 해상 운송로와 에너지 시설이 영향을 받으면서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 연쇄적인 계약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불가항력 조항은 전쟁, 자연재해 등 기업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계약상 의무 이행을 일시적으로 면제하거나 지연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다. 최근 Strait of Hormuz를 지나는 선박에 대한 공격과 긴장이 고조되면서 기업들이 손해배상 책임을 피하기 위해 해당 조항을 잇따라 적용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불가항력을 선언한 곳은 QatarEnergy다. 이란의 보복 공격으로 카타르 북부 라스라판 시설이 피격된 이후, 카타르에너지는 지난 2일 액화천연가스(LNG) 생산을 중단하고 고객사를 대상으로 불가항력을 통보했다.
이 여파로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도 영향을 받고 있다. 세계 최대 LNG 거래 업체 가운데 하나인 Shell은 카타르산 LNG 물량에 대해 고객사에 불가항력을 선언했으며, TotalEnergies 역시 카타르로부터 동일한 통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걸프 지역 다른 에너지 기업들도 생산 차질을 겪고 있다. Kuwait Petroleum Corporation은 이란의 공격과 호르무즈 해협 통항 위협을 이유로 예방적 감산에 들어갔다. 또한 바레인의 국영 정유회사 Bapco는 알마미르 정유시설 화재로 계약 이행을 중단했다.
불가항력 선언은 에너지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있다. 세계적인 알루미늄 생산업체인 Aluminium Bahrain (Alba)도 해상 운송 차질을 이유로 일부 고객사에 불가항력을 통보했다. 인도의 Hindalco Industries 역시 LNG 공급 차질로 압출 알루미늄 판매를 중단했다.
한국에서도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국내 최대 단일 에틸렌 생산업체인 Yeochun NCC가 불가항력을 선언했으며,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주요 제조 산업 전반으로 생산 차질이 확산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걸프 지역 기업들의 불가항력 선언이 글로벌 공급망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Saad Al-Kaabi 카타르 에너지부 장관은 최근 인터뷰에서 “현재 상황이 지속된다면 아직 불가항력을 선언하지 않은 국가들도 며칠 내 같은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며 “걸프 지역의 수출 기업 대부분이 불가항력을 선언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장에서는 중동 에너지 공급 차질이 장기화될 경우 글로벌 에너지 가격 상승과 함께 산업 전반의 공급망 불안이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규현 기자 kh.choi@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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