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엔 나무, 한 손엔 전기톱 든 전사”…구순의 현역 김윤신, 끝은 없다 [전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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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엔 나무, 한 손엔 전기톱 든 전사”…구순의 현역 김윤신, 끝은 없다 [전시리뷰]

경기일보 2026-03-15 22:16:02 신고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전시장에서의 김윤신 작가. 전명은 사진, 호암미술관 제공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전시장에서의 김윤신 작가. 전명은 사진, 호암미술관 제공

 

“나무는 바로 나 자신이자 오랜 친구입니다.”

 

구순을 넘긴 현역 작가 김윤신(91)은 자신의 지난 70년 창작 인생을 함께해온 ‘나무’의 존재를 이렇게 설명했다. 작가인 나와 자연이 하나가 되는 순간 또 다른 존재인 작품이 탄생한다는 그의 조형 이념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역시 이러한 사유에서 비롯된다. 그는 나무를 재료가 아닌 친구로 여긴다. 어린 시절 자연과 함께 놀던 기억이 지금까지 그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지난 작업 과정을 설명하던 작가의 얼굴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연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며 지난 세월을 회고했다.

 

호암미술관에서 17일 개막하는 회고전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한국 여성 조각가 1세대 김윤신의 70년 작업 세계를 조망하는 전시다. 그의 초창기 나무 조각부터 석판화, 회화 등 장르를 넘나드는 170여 점의 작품이 모였다.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며 두 세기에 걸쳐 제작한 작품만 1천500여 점에 이른다. 이번 전시는 작가 생애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이자 호암미술관이 개최하는 첫 한국 여성 작가 개인전이다. 동시에 한국 현대조각의 한 흐름을 다시 바라보는 자리이기도 하다.

 

■ 격동의 현대사 지나 유럽·남미 거쳐 한국…다층적 예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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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전경. 작가는 ‘나무’를 ‘나 자신’이라고 표현했다. 이나경기자

 

김윤신의 예술은 ‘두 세계의 공존’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과 원시성이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현대성을 띤다. 한국의 토속 문화와 무속 신앙, 그리고 기독교적 세계관이 공존하며 이국적이면서도 친숙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전시는 그의 삶의 흐름을 연대기적으로 따라가기보다, 삶이 녹아든 작품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예술 세계를 입체적으로 다룬다.

 

193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작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성장했다. 생사를 알 수 없던 아들을 위해 매일 새벽 산에 올라 작은 돌을 하나씩 쌓으며 기도하던 어머니와의 추억은 훗날 연작 ‘기원쌓기’로 이어졌다. 나무를 위로 쌓아 올린 조각은 김윤신 그 자신이다. 절대자를 향한 기도, 예술에 대한 열망이 상징적으로 담겨있다. 회화와 조각 전반에 걸쳐 삼각형을 하늘의 상징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1960년대 파리 유학 시절 제작된 석판화 작품 ‘예감’은 그의 대표적인 판화 작품이다. 소라고동처럼 휘어지는 곡선과 긴장감 있는 직선이 맞물린 화면은 조각적 감각이 평면으로 옮겨진 듯한 인상을 준다. 전시는 이러한 판화와 드로잉을 나무 조각들과 함께 배치해 평면과 입체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한 공간을 만든다.

 

김윤신 작가의 ‘지향적 염원’ 시리즈. 1970년대 초 김윤신은 조각과 함께 역동적인 도형의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적극 시도했다. 이나경기자
김윤신 작가의 ‘지향적 염원’ 시리즈. 1970년대 초 김윤신은 조각과 함께 역동적인 도형의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적극 시도했다. 이나경기자

 

■ 안정된 삶 떠나 남미로…전기톱을 든 여성 조각가

 

김윤신의 작업 세계를 바꾼 결정적인 사건은 1983년 아르헨티나 이주였다. 당시 그는 중견 미술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지고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나무가 아주 좋다’는 조카의 말에 이끌려 방문한 남미의 자연에 매료돼 모든 기반을 내려놓고 낯선 땅에 정착했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자연 속 마을의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처럼 자라난 한국의 자연은 전쟁과 폭격으로 폐허가 돼 있었다. 불타 사라진 자연을 먼 타국에서 다시 마주한 셈이다.

 

한국의 나무가 비교적 부드럽고 작은 데 비해 남미의 나무는 단단하고 거대했다. 그는 그 나무를 다루기 위해 전기톱을 들었다. 중년의 여성 조각가가 전기톱을 들고 거대한 나무를 파고드는 모습은 당시로서는 낯선 풍경이었다.

 

“톱하고 내가 하나가 돼야 합니다. 톱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작업도 자연스럽게 되죠.”

 

지난 11일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김윤신: 합이합이 분이분일’ 기자간담회에서 김윤신 작가(가운데)가 자신의 회고전에 관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왼쪽부터)김성원 호암미술관 부관장, 김윤신 작가, 태현선 수석 큐레이터. 이나경기자
지난 11일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김윤신: 합이합이 분이분일’ 기자간담회에서 김윤신 작가(가운데)가 자신의 회고전에 관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왼쪽부터)김성원 호암미술관 부관장, 김윤신 작가, 태현선 수석 큐레이터. 이나경기자

 

전기톱의 거친 흔적은 그의 조각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깊게 파인 구조와 거친 표면은 자연의 원초적인 생명력을 드러낸다. 관람자가 작품 주변을 돌며 바라보면 하나의 몸체처럼 보이기도 하고 뼈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친 나무껍질과 매끈한 단면이 공존하며 자연과 인간의 노동이 동시에 드러난다.

 

2층 전시장에는 멕시코와 브라질 오지 채석장에서 제작한 돌 조각들이 등장한다. 나무와 차원이 다른 고된 노동임에도 그는 90점 가까운 돌 조각을 완성했다. 거친 돌 표면과 내부에서 드러나는 자연 색채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남미 원주민 문화에서 영감을 얻은 색과 문양이 작품에 더해진다.

 

■ 구순에도 멈추지 않는 실험 ‘회화-조각’

 

2층 전시장에는 2020년 코로나로 외부활동이 제한됐던 시기 작가가 만든 작품들이 런웨이처럼 펼쳐져 있다. 이나경기자
2층 전시장에는 2020년 코로나로 외부활동이 제한됐던 시기 작가가 만든 작품들이 런웨이처럼 펼쳐져 있다. 이나경기자

 

70년 넘는 창작 기간 김윤신의 작업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코로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외출이 제한되면서 조각용 원목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그는 공사장에서 떨어진 나무 조각들을 주워와 회화와 조각이 결합된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 별하고 놀고 비가 오면 빗방울하고 얘기하고 풀과 나무하고 놀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그 기억은 새로운 작업 방식으로 이어졌다. 기존 조각을 금속으로 캐스팅한 뒤 그 위에 색채를 더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를 ‘회화-조각’이라 부른다. 조각 표면이 캔버스처럼 활용되며 색과 문양이 자유롭게 펼쳐진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 시작된 새로운 장르로의 실험이다.

 

전시장 마지막에 놓인 대형 조각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分二分一) 2013-16’은 안데스 산맥에서 받은 영감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양팔을 벌린 듯한 형태와 푸른 색채가 남미의 산세와 빙하를 떠올리게 한다. 이와 함께 테라스에 설치된 ‘노래하는 나무 2013-16V1’은 2013년 제작된 나무 조각을 금속으로 캐스팅해 회화를 입혀 지난해 새롭게 완성한 작품으로, 최근 전념하는 회화-조각 결합의 연장성이다.

 

김윤신 작가의 ‘노래하는 나무 2013-16V1’(2025). 이번 회고전의 중심이기도 한 작품으로 과거 제작했던 나무 조각을 금속으로 캐스팅한 뒤, 채색을 입혀 새로운 창작품으로 만들며 창작 이념 ‘합이합일 분이분일’을 여실히 드러냈다. 호암미술관 제공
김윤신 작가의 ‘노래하는 나무 2013-16V1’(2025). 이번 회고전의 중심이기도 한 작품으로 과거 제작했던 나무 조각을 금속으로 캐스팅한 뒤, 채색을 입혀 새로운 창작품으로 만들며 창작 이념 ‘합이합일 분이분일’을 여실히 드러냈다. 호암미술관 제공

 

격동의 현대사를 지나 동아시아와 유럽, 남미를 가로지르는 여정에서 자연과 문화를 흡수한 김윤신은 지금도 새로운 작업을 꿈꾼다. “돌과 나무를 다루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렵고 고된 작업입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70년 동안 나무와 돌을 깎아온 김윤신의 예술은 현재 진행 중이다.

 

전시는 6월28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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