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하늘에서 포성이 멈추지 않고 있다. 전운이 짙어질수록 세간의 관심은 전선의 이동과 군사적 승패, 혹은 국제 유가의 향방에 쏠린다. 그러나 이 전쟁 앞에서 공학자인 필자의 마음을 가장 깊게 후벼 파는 것은 따로 있다. 인류의 진보를 증명해야 할 과학의 정수가 지금 무엇을 파괴하고 있는가. 또한 누구를 죽이는 데 동원되고 있는가. 필자는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기술이 윤리를 잃었을 때 그것은 이미 문명이 아니라, 정교하게 가공된 야만에 불과하다.
수천만 원짜리 공격 드론을 막기 위해 수십억 원의 미사일이 발사되고, 더 효율적인 파괴를 위해 정밀 유도 무기와 레이저 무기까지 동원된다. 인류가 수백 년 동안 축적해 온 과학과 공학의 성취가 전장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단 하나,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파괴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기괴한 소모전의 숫자 뒤에는 화염에 휩싸인 도시와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절규가 있다. 폭탄이 터질 때마다 평범한 일상은 한 줌의 먼지로 변하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증오와 파괴된 개개인의 우주뿐이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이 참혹함에 무감각해지며, 사라지는 생명들을 그저 통계 속 무심한 숫자로 소비하게 되는 비극을 방관하게 된다.
과학의 성취가 생명의 존엄을 배반하고 파괴의 정밀함에만 복무할 때, 과학은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쌓아 올린 지식의 탑이 스스로를 짓누르며 무너지는 순간이며, 우리가 일구어 온 문명의 설계도가 통째로 붕괴되는 비극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에너지와 과학기술이 사회와 만나는 지점을 고민해 왔다. 태양전지 연구 현장에서,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공적 자리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치를 두었던 바른 과학기술사회실현을 위한 시민단체의 상임대표 활동 속에서 반복해서 마주했던 질문이 있다.
"기술은 결국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지금의 전쟁은 그 질문을 다시 정면으로 던지고 있다.
생명의 무게를 잊어버린 전쟁
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인간의 얼굴이다. 남는 것은 전황과 숫자뿐이다.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 구조대가 콘크리트를 걷어내는 장면이 세계 뉴스에 전해지기도 했다. 학교 건물이 폭격으로 무너져 어린 학생들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교과서와 책가방이 흩어진 교실이 순식간에 집단 무덤이 되는 현실은 전쟁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보여준다.
문제는 이러한 장면들이 어느 특정한 전쟁의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류의 전쟁사는 늘 같은 장면을 반복해 왔다. 이름과 국적만 달라질 뿐, 전쟁이 남기는 참상은 언제나 반복된다.
우리는 거실의 텔레비전 화면과 스마트폰의 매끄러운 유리벽 뒤에 숨어 누군가의 우주가 무너져 내리는 절규의 현장을 관음하듯 목도하고 있다. 한 인간의 영혼이 부서지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무심하게 채널을 돌리는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전쟁의 포화보다 더 서늘한 문명의 파산 선고일지도 모른다. 전쟁은 에너지를 태우지만, 그 불길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생명이다.
엔트로피의 법칙: 무질서를 향해 가속하는 문명
공학자의 시선에서 전쟁은 정치적 사건일 뿐 아니라 물리적 사건이기도 하다. 시작되는 순간 막대한 에너지가 열과 파괴의 형태로 방출되며, 무너진 도시를 복구하기 위해 다시 천문학적인 에너지의 소비를 요구한다. 결국 전쟁은 인간이 설계한 가장 거대한 ‘에너지 낭비의 체계’다.
이 재앙은 ‘열역학 제2 법칙’이라는 우주적 원리로 설명된다. 모든 에너지는 사용될수록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흐르며, 이때 증가하는 무질서의 정도인 ‘엔트로피(Entropy)’는 필연적으로 높아진다. 정갈하게 정리된 방이 시간이 지나면 어질러지기 쉬운 것과 같다. 지구 시스템 역시 무분별한 에너지 방출 앞에 기하급수적으로 혼란스러워진다. 인류 문명은 그 흐름에 맞서 그간 이 엔트로피의 증가를 늦추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에너지를 투입하며 버텨온 ‘질서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그 모든 투쟁의 성과를 단숨에 원점으로 되돌려 버린다. 미사일 한 발이 내뿜는 열과 가스, 불타는 유전에서 배출되는 탄소는 지구라는 닫힌계(Closed System)를 무질서의 심연으로 밀어 넣는다. 수십 년간 이어온 탄소 절감과 기후 위기 대응 노력은 쉼 없이 쏟아지는 포격 속에 단숨에 무력화되고 있다. 전쟁은 단순히 인간을 죽이는 폭력이 아니다. 문명이 어렵게 쌓아 올린 질서를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자멸적 선택이며, 지구 시스템의 균형을 가장 거칠게 흔드는 반(反)과학적 행위다.
문명의 관점에서 전쟁은 명확한 사실 하나를 드러낸다. 인류가 쌓아 올린 지식과 기술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쓰이지 않을 때, 그것은 가장 정교한 방식으로 문명을 붕괴시키는 파괴의 동력이 될 뿐이다. 전쟁은 인간의 폭력을 넘어, 문명이 스스로 만들어 낸 가장 거대한 엔트로피의 폭발이다.
에너지 윤리의 실종: 소유를 넘어선 공존의 생존학
이 전쟁의 기저에는 어김없이 에너지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며칠 사이 쏟아지는 전쟁 뉴스들은 전략적 분석으로 가득하다. 누가 누구를 고립시키는지, 어떤 루트를 차단하며 실익을 챙기는지에만 매몰되어 있다. 어떤 뉴스에 채널을 맞추느냐에 따라 비난의 화살은 특정 국가나 인물을 향하겠지만, 공학자인 필자의 눈에 비친 본질은 그보다 훨씬 참담하다. 지금 벌어지는 사태는 어느 한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문명 자체가 에너지를 대하는 윤리적 기반이 통째로 붕괴하고 있다는 명백한 징후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전쟁은 과거처럼 단순히 유전을 탈취하려는 일차원적 영토 전쟁을 넘어섰다. 에너지를 볼모로 공급 루트를 차단하고 전 세계를 경제적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를 통해 특정 정권을 압박하거나 국제 사회의 양보를 얻어내려는 '에너지 지정학적 인질극'이다.인류 역사에서 에너지는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권력의 중심이었다. 누군가는 내 땅 아래 묻힌 화석 연료가 국가의 전리품이자 배타적 권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학적 시선으로 볼 때, 에너지는 지구가 수억 년간 축적해 온 자연의 산물이자 '공동의 생명선'이다. 그러나 에너지가 삶을 지탱하는 온기가 아닌, 세계를 고립시키고 타자를 굴복시키는 차가운 칼날로 쓰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정당한 국가 권력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를 공멸로 몰아넣는 비윤리적 지렛대이자 문명의 역행일 뿐이다.
오늘날의 전쟁은 에너지를 전략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는 '자원 무기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에너지 공급망을 끊어 전 세계를 인질로 잡고 정치적 실익을 챙기려는 행태는, 기술의 진보를 야만으로 되돌리는 가장 비윤리적 행위다. 여기서 우리는 강한 의구심을 던져야 한다. 특정 세력이 인류 공동의 생명선인 에너지 루트를 독점하고 이를 살상의 수단이나 정치적 협박 카드로 활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권리'인가?
에너지 윤리는 단순히 자원을 나누자는 온정주의가 아니다. 한정된 자원과 생태적 한계를 지닌 지구 시스템 내에서 에너지를 지배의 무기로 삼는 행위가 결국 전 지구적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한다는 엄중한 경고다. 내 마당에서 지른 불이 결국 내 집 전체를 태우듯, 공급망을 무력화하여 벌이는 전쟁의 엔트로피는 국경을 넘어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협한다. 에너지는 승자의 전리품도, 협박의 도구도 아니다. 인류라는 종(種)의 영속을 위한 최소한의 공공재로 다루어져야 한다.
결국 지금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더 효율적인 에너지 확보 기술이 아니라 에너지를 대하는 '지식인의 윤리'다. 진영 논리를 떠나 에너지를 지배와 압박의 수단으로 삼는 이 야만을 멈추고 공존의 기반으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문명의 파산을 막을 마지막 열쇠다.
국가 에너지 정책: 지배의 기술인가, 평화의 설계인가
이쯤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에너지 정책을 결정하는 이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에너지 정책은 과연 무엇을 향해 설계되고 있는가. 그것은 단지 산업을 지탱하는 기술적 수급의 문제인가, 아니면 전쟁과 자원 무기화의 시대에 국가와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전략인가.
에너지 정책은 단순히 전력을 수급하는 산업 정책의 차원을 넘어, 국가의 주권과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는 고도의 통치 전략이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의 화석 연료나 중앙 집중형 에너지 공급망에 의존도가 높을수록, 국가는 국제 지정학적 파고와 자원 무기화의 압박 앞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에너지의 자립성과 분산성은 환경 보호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국가의 안보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되었다.
태양과 바람은 국경을 모른다. 누구도 독점할 수 없으며, 물리적으로 차단하거나 인질로 잡을 수도 없다. 이 분산형 에너지는 지구가 인류에게 부여한 가장 공정하고 보편적인 생명선이다. 우리가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이 거대한 엔트로피의 폭발인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외부의 위협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에너지 주권을 확립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전환은 단순히 발전 방식을 바꾸는 기술적 공정이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를 지배와 억압의 도구에서 평화와 공존의 기반으로 대전환하는 문명사적 선택이다. 국가 지도자들은 당장의 경제적 실익이나 정파적 이해관계를 넘어, 에너지의 흐름이 곧 평화의 흐름이 될 수 있는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기술이 윤리를 만나고, 과학이 생명을 지키는 방벽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문명의 파산을 막고 아이들에게 지속 가능한 세계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인의 정직함: 미래 세대를 향한 대답
언젠가 우리의 아이들이 이 야만의 시대를 돌아보며 물을 것이다. 전쟁과 기후 위기가 동시에 인류를 옥죄던 시대에 어른들은 대체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이다. 그 준엄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
우리가 남겨야 할 대답은 명확하다. 우리는 파괴의 정밀함을 자랑하는 기술보다 생명의 지속 가능성을 먼저 고민했으며, 에너지를 지배의 도구가 아닌 공존의 자산으로 되돌리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의 성취가 생명의 존엄을 배반하고 파괴의 효율에만 복무한다면, 그 과학은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문명이 쌓아 올린 지식의 탑이 스스로를 짓누르며 무너져 내리는, 되돌릴 수 없는 문명사적 파산일 뿐이다.
포성이 멈춘 폐허 위에 결국 남는 것은 전술의 승패가 아니라 생명과 윤리의 잔해다. 전쟁은 에너지를 태우지만, 그 불길 속에서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한 인간의 온전한 생명과 문명의 양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다시 묻는다. 에너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려는 고통스러운 노력, 그리고 기술의 칼날을 내려놓고 공존의 설계도를 그리는 결단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남길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소한의 책임일 것이다. 인류의 지성이 파괴의 엔트로피를 멈추고 다시 생명의 조화로 향하길, 공학자인 필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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