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 미술가가 빚은 역대급 숲속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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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 미술가가 빚은 역대급 숲속 작업실

엘르 2026-03-14 20:20:34 신고

작업실 한 쪽에 놓인 ‘아프리카의 꿈’ 시리즈.

작업실 한 쪽에 놓인 ‘아프리카의 꿈’ 시리즈.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숲속에 자리 잡은 신상호 작가의 스튜디오는 그의 60년 예술 인생을 집약한 지성소다. 오직 앞을 향해 돌진하는 종마처럼 1960년대부터 도예를 시작한 이래 그는 좀체 뒤돌아본 적이 없다. 한국 전통 도예 장인, 도자 조각과 건축 도자의 선구자, 도예의 배신자 혹은 이단아, 교수, 기획자, 컨테이너 단위로 물건을 실어 오는 역대급 컬렉터. 신상호를 향한 이 수식어들은 그저 새로움을 찾기에 바빴던 행보를 신통하게 여기거나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붙인 것일 뿐, 정작 본인은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를 ‘흙장난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경기도 양주에 자리 잡은 작업실 내부. 실제 작업이 이뤄지는 곳.

경기도 양주에 자리 잡은 작업실 내부. 실제 작업이 이뤄지는 곳.

미술 대학을 다니다 별안간 옹기쟁이가 되겠다며 이천 도예 공방에 들어간 청년 신상호의 치기는 올해 78세가 된 노장의 여유로운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다. 1976년 허름한 우사가 놓인 부지에 집과 작업실을 짓고 살아온 지 50년. 그간 건물에는 지붕부터 출입문, 벽과 바닥, 계단과 문 손잡이, 테이블과 의자에까지 세라믹이 덧대어졌고, 수백 점의 작품은 물론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지는 방대한 수집품들이 구석구석 각을 맞춰 정리돼 있었다. 2015년 대중에게 공개한 야외 전시 공간과 카페, 미술관은 전체 중 일부에 불과하다.


흙판에 그림을 그려 구워낸 다음 벽에 타일처럼 붙인 ‘구운 그림’ 시리즈.

흙판에 그림을 그려 구워낸 다음 벽에 타일처럼 붙인 ‘구운 그림’ 시리즈.

작품 제작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작업대.

작품 제작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작업대.

아프리카 초원을 힘차게 달리는 말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구조와 힘-말’.

아프리카 초원을 힘차게 달리는 말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구조와 힘-말’.

어두운 흙 위에 백토를 발라 다양한 기법으로 장식한 ‘분청’ 시리즈.

어두운 흙 위에 백토를 발라 다양한 기법으로 장식한 ‘분청’ 시리즈.

스튜디오 뒤편에는 군용 폐텐트로 지어진 작업장과 각양각색의 컨테이너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다. 작품이나 수집품을 둘 곳이 마땅치 않으면 즉시 건물을 세우고,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남는 부재가 생기면 지체 없이 공간을 뜯어고친 결과다. 평생 흙장난하며 살아온 예술계의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일생에 걸쳐 일군 놀이터이자 수 겹의 시간이 쌓인 혼돈의 분더카머. 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믿을 수 없이 방대한 작업실은 신상호의 여정처럼 멈춤을 모른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로에베가 후원한 대규모 회고전 〈신상호: 무한변주〉가 화제였어요. 한국적 깊이가 느껴지는 전통 도예부터 강렬한 아우라를 풍기는 도자 조각, 기존 도예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자 타일과 방대한 수집품까지. ‘이게 정말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게 맞나?’ 싶었습니다

60년간 해온 작업을 한자리에서 보는 건 저도 처음입니다. 솔직히 말해 잊고 있던 작업도 많았는데, 스스로 돌아볼 수 있었죠. 살면서 갖기 어려운 기회가 주어져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무한 변주’라는 말이 그간의 여정과 잘 어울려요

저는 가만히 못 있어요. 성공한다 싶으면 도망쳐요. 사람들이 내 작품을 원하고 찾기 시작하면 장사꾼이 된 것 같아요. 성공한 작업을 반복하는 건 결국 자기복제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게 싫어 늘 특정 시점에서 다른 작업으로 넘어갔어요.


작업실 문 앞에 선 신상호 작가.

작업실 문 앞에 선 신상호 작가.

책꽂이를 빼곡히 수놓은 ‘헤드 시리즈(Head Series)’. 아프리카의 꿈’ 연작으로 빼곡한 작업실 귀퉁이. 알루미늄판 위에 흙을 얹고 물감을 떨어뜨리는 기법으로 완성한 '묵시록' 일부.

전시가 신상호의 예술 여정을 정제된 방식으로 만나는 시간이었다면, 장흥 작업실은 신상호라는 사람의 우주와 맞닥뜨린 것 같습니다

이북과 가깝고 외진 지역이라 사람들과 관계 맺기가 쉽지 않은 곳입니다. 40년 동안 아무도 들이지 않고 작업만 했습니다.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요. 저는 건축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제 작업에서 건축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건물이 들어서면서 안과 밖이 구분되고, 작품을 둘 벽과 바닥이 생기니까요. 공간이 있어야 작품이 존재 의미를 갖게 돼요.


지붕과 벽, 바닥을 가득 채운 타일 작품과 철판, 세라믹과 접목된 가구들까지. 그야말로 작가님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네요

필요에 따라 공간을 조금씩 넓히고 손보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커미션 작업하고 남은 작품이나 재료를 가져와 덧댄 부분도 있고요. 공간에 결합된 작품이 시간이 지나며 생기는 자연스러운 변화, 파티나를 지켜봐 왔죠.


직접 덧댄 철판과 타일로 건물 안팎을 장식한 스튜디오 안의 여러 건물들.

직접 덧댄 철판과 타일로 건물 안팎을 장식한 스튜디오 안의 여러 건물들.

국적과 용도, 값어치가 각기 다른 방대한 수집품도 인상적입니다. 신상호에게 수집이란

수집은 작품과는 다르지만 작품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콘텐츠가 나와요.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상상합니다. 예를 들어 저 창가에 놓인 촛대는 성당에서 사용했고, 그 아래 놓인 박스는 아메리카 남부에서 옷을 보관하던 거예요. 완전히 다른 문화권의 사물이죠. 이런 것들이 만나면 상상의 여지가 생깁니다. 박스에 넣었다 빼며 컬렉션을 조합하다 보면 형태와 의미가 자유자재로 변해요. 그 과정에서 영감을 발견하게 됩니다.


1968년 학부생 시절 이천 도예 마을을 방문한 이후 쭉 흙을 만져오고 있어요. 앞길 창창한 청년에겐 의외의 선택이었을 것 같습니다

20대 때의 저는 반항의식이 강했습니다. ‘공부해라, 의사 돼라’ 하는 집안과 당시 사회를 향한 저항의 몸짓이기도 했어요. 그때는 도예라는 개념도 없었고, 흙을 만지는 사람은 그저 옹기쟁이라고 불렸습니다. 저는 흙을 만지는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어요. 마음이 편했고, 부자가 될 필요도 못 느꼈죠. 그런 경향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지금까지 흘러온 거죠. 사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제목도 처음엔 ‘흙장난’으로 하려고 했는데, 다소 가벼워 보여 바꾼 거예요.


흙이 왜 좋은가요

흙만큼 재미있는 재료가 없어요. 금속이나 나무, 돌, 유리 등의 재료는 이미 저마다 성질과 방향성이 있지만, 흙은 그냥 흙입니다. 그 자체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이고, 물에 섞어서 만져야 형태가 나타나죠. 흙장난이라고 해서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다뤄보면 굉장히 어려운 재료입니다. 동시에 고갈되지 않는 자원이기도 하죠. 아이디어도 마찬가지예요. 쉽게 소진될 것 같지만 계속해서 연구하면 끝없이 생성되니까요. 제 작업은 고갈되지 않는 두 가지, 흙과 아이디어가 만나는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전통 도예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안주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도자를 이용한 조각과 회화 그리고 건축 외벽까지, 그야말로 흙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왔죠

새롭지 않으면 못 견뎌요. 지루한 건 정말이지 못 참습니다. 전통 도예로 자리를 잡고 나니 순수 미술과의 연계를 고민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작업한 분청 항아리들은 당시 제가 느낀 갈등의 집합체예요. 물레로 만들었기 때문에 형태는 다 원형이지만, 표면은 칼로 긁고 흙을 채우며 그림을 그렸죠. 캔버스에서 그림을 그리고 지우며 반복하듯이요. 몇 년 지나고 나서 분청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이걸 끊어내야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1990년대부터는 흙으로 빚은 동물 형상이 작업의 중요한 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토템이나 수호신처럼 보이는 원시적 느낌의 조각들 말이죠

아프리카의 영향이 컸죠. 한 서른 번 정도 다녀온 것 같아요. 도시 밖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자연이 살아 있는 그곳에서 마지막 생을 맞고 싶었죠. 1995년 10월 4일, 런던의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에서 열린 〈Africa: The Art of a Continent〉를 본 경험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전통 미술과 유산을 소개한 대형 전시로, 그때부터 아프리카 미술품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일반 미술이 학습과 사유를 통해 만들어진 ‘지적 아름다움’이라면, 원시미술은 ‘나와 내 가족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샤머니즘적 소망에서 출발합니다. 19세기 말 유럽 미술이 새로 발굴할 미술 콘텐츠를 찾기 어려울 때 피카소나 고갱, 샤갈 같은 작가들이 원시미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지 않았습니까? 그런 만남은 여전히 유효하고 강력한 예술적 콘텐츠로 이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원시미술은 제게 중요한 영감의 원천입니다.


쓰임과 가치의 범주를 초월한 신상호 작가의 수집품들. 다양한 사물의 퍼즐을 맞추듯 배열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영감이 된다.

쓰임과 가치의 범주를 초월한 신상호 작가의 수집품들. 다양한 사물의 퍼즐을 맞추듯 배열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영감이 된다.

흙으로 빚은 동물 형상의 조각을 보면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운이 느껴집니다. 원시미술의 시작이 염원이듯 이 조각 작품에도 작가님의 염원이 담겨 있나요? 신상호에게 이 토템은 어떤 존재일까요

흙장난으로 시작해 여기까지 왔어요. 흙으로 먹고살며 가족을 부양했죠. ‘계속 작업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마음이 들어가 있었어요. 저는 토템을 ‘내가 보는 대상’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존재’로 여기고 만들었어요. 묘하게 시선이 따라오는 것 같고, 볼 때마다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듯하죠. 특정 동물을 지칭하진 않았고 지구상의 여러 동물 이미지가 혼재된 상상 속 형상입니다. 그 조각들은 제 감정과 생각이 사람에게 닿도록 도와주는 전달자예요. 다리가 여러 개로 된 말은 제가 아프리카에서 느낀 ‘힘’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동물들이 먹고살기 위해 쫓고 도망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봤어요. 그 다리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성과 에너지가 정말 압도적이었죠.


50×50cm 정사각형 흙판에 그림을 그린 후 여러 번의 소성을 거쳐 완성하는 도자 타일 작업으로 흙의 가능성을 또 한 번 확장했죠. 기후 변화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 내구성 덕에 건축물 외장재로 활용 가능한 ‘구운 그림(Fired Painting)’ 시리즈가 그것입니다

타일이라는 소재의 역사가 수천 년인데, 한번 부착하면 뗄 때 깨뜨려야 하는 게 늘 의문이었습니다. 사람이 필요에 따라 옷을 갈아입듯 건물도 옷을 갈아입을 수 있어야 한다고 봤어요. 그렇게 탈착 가능한 도자 타일과 접착 방식을 개발했습니다. 저 뒤쪽 벽에 붙어 있는 타일은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에 쓸 걸 테스트해 본 거예요.


 직접 칠해 구워낸 형형색색의 타일이 깔린 미술관 바닥. 정확한 색 구현을 위한 테스트 과정을 보여주는 작은 타일 조각들 타일을 조합해 만든 문손잡이.

2017년부터는 ‘흙으로 그린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묵시록’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알루미늄판 위에 흙을 얹고 물감을 떨어뜨리는 방식의 회화죠

캔버스 대신 알루미늄 판을 썼습니다. 회화엔 늘 규격이 있잖아요. 이건 붙이면 붙이는 대로 크기를 늘릴 수 있습니다. 시작은 작업실을 만들며 심은 느티나무였어요. 2017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그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데, 나뭇잎 사이로 빛이 드는 걸 보고 있으니 나무가 오히려 나를 지켜보는 것 같더군요. 여태껏 제가 살아온 순간들, 좋았던 시간부터 나빴던 시간까지 그 모든 걸 나무가 봤겠구나 싶었어요. 그때 결심했습니다. ‘이제 나는 너만 그리다 죽겠다’고요. 시골에 가면 큰 고목 아래서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 나누고 음식 먹으며 시간을 보내잖아요. 그 나무처럼 제가 죽고 난 뒤에도 ‘신상호가 살다 간 곳’으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요.


신상호의 다음 변주는? 예술가로서 어떤 바람을 품고 있나요

여기까지 왔다’거나 ‘이제 끝이다’ 같은 말은 할 수 없어요. 그냥 살다가 어느 날 탁, 그렇게 끝나겠죠.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좀 더 바란다면 계속 수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수집은 작업에 비하면 아주 ‘익사이팅’해요. 골머리도 안 아프고요. 앞으로는 ‘묵시록’ 연작을 계속 이행하면서 수집품을 활용한 설치미술 작업에만 매진하려 합니다. 그래서 계속 모으는 거예요. 모아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려고요. 그럼 사람들이 이렇게 묻겠죠. “신상호는 왜 정신병자처럼 저런 걸 계속 모을까?” 그때 전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놈아, 이게 예술이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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