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짐승을 거두는 마음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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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짐승을 거두는 마음의 대가

나만아는상담소 2026-03-14 03:28:00 신고

어둑한 골목길, 비를 고스란히 맞고 서 있는 길고양이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거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그는 지난 연애에서 겪은 배신과 상처를 쓸쓸하게 꺼내놓는다.

  • - “난 항상 진심이었는데, 결국 다들 날 귀찮아하고 떠나더라고. 내 운명이 그런가 봐.”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쪽이 저릿해진다. 세상의 모진 풍파를 혼자 다 맞은 듯한 처연함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친 짐승을 가여워하는 마음. 기꺼이 내 따뜻한 방 한편을 내어주고 싶어 진다.

정성껏 상처를 핥아주고 온기를 나누면, 언젠가 경계를 풀고 나에게만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줄 거라 믿는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아주며 기꺼이 그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기로 결심한다.

지독한 살점 뜯기기의 서막이다.

길들일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

내현성 나르시시스트가 보여주는 상처는 치유를 기다리는 아픈 흉터가 아니다. 상대를 조종하고 통제하기 위해 날카롭게 벼려둔 송곳이다. 그들은 버림받은 짐승 특유의 가여운 자태를 뽐내며 당신의 보호본능을 기가 막히게 자극한다.

  • - “나는 버림받는 게 너무 무서워. 네가 조금만 연락이 안 돼도 숨이 턱턱 막혀.”

상처를 고백하는 애틋한 투정처럼 들린다. 속내는 전혀 다르다. ‘내 과거의 불행을 빌미로 네 일상을 통제할 테니, 너는 내 부름에 즉각 반응하며 영원한 충성을 증명하라’는 무자비한 청구서다.

당신은 이 가엾은 영혼을 치유하겠다는 사명감에 휩싸인다. 짐승의 불안을 잠재우려 친구들과의 만남을 끊어내고, 수시로 일상을 보고하며 안심시킨다.

내가 더 많은 애정을 쏟아붓고 헌신하면 이 사람의 깊은 불신도 언젠가 씻겨 내려갈 거라 굳게 믿는다. 다친 짐승을 사랑으로 길들일 수 있다는 그 순진한 착각이 스스로의 발목을 옥죈다.

먹이를 준 손을 물어뜯는 습성

방 안으로 들인 짐승은 결코 얌전하지 않다. 당신이 정성껏 차려준 밥상을 뒤엎고, 틈만 나면 먹이를 내민 당신의 손가락을 꽉 깨문다. 피곤한 기색을 보이거나, 무리한 요구를 제때 들어주지 못할 때면 가차 없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다.

  • - “너도 결국 나를 짐으로 생각하는구나. 예전 사람들이랑 다를 줄 알았는데 똑같네.”

자신의 억지를 받아주지 않은 당신을 향한 비수다. ‘네가 감히 내 비위를 완벽하게 맞추지 않았으니, 너를 모진 가해자로 만들어 평생 죄책감을 짊어지게 하겠다’는 잔인한 공격이다.

물린 자리가 욱신거려 눈물이 핑 돌지만, 화를 내기보다 덜컥 겁부터 난다. 이 사람 아직 상처가 덜 아물어서 방어적인 건데 내가 너무 성급하게 굴었구나.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등 뒤로 숨기고 오히려 놀란 그를 달래기 바쁘다.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당신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수록 그의 이빨은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남의 상처를 보듬어 주려다 정작 당신의 몸과 마음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중이다.

피 냄새를 맡고 자라는 허기

그의 상처는 당신의 사랑으로 절대 아물지 않는다. 애초에 나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과거의 아픔은 평생 우려먹을 수 있는 든든한 밥줄에 가깝다.

상처가 말끔히 나아버리면 당신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뜯어낼 명분이 허공으로 사라진다. 잊을 만하면 스스로 흉터를 헤집어 피를 내고는 당신 눈앞에 들이민다.

  • - “내가 이렇게 아픈데 넌 어떻게 편하게 웃고 떠들 수 있어?”

진통제나 위로를 달라는 게 아니다. ‘내가 피를 흘리고 있으니 너도 당장 일상의 기쁨을 포기하고 내 고통에 동참하라’는 억지다.

당신은 서서히 말라 죽어간다. 당신의 살점을 뜯어먹으며 그의 덩치는 날로 거대해지지만, 정작 당신의 헐어버린 상처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선한 고기를 내어주고도 늘 죄인이 되어야 하는 이 기형적인 관계 속에서, 맑았던 일상은 진동하는 피비린내로 덮여버린다. 짐승을 거두어들인 대가는 혹독하다. 당신의 영혼과 일상이 통째로 뜯어 먹힌 채 빈 껍데기만 뒹굴게 된다.

방문을 열고 길거리로 내보낼 시간

상처받은 대상을 외면하지 못하는 그 다정한 마음씨는 아무 잘못이 없다.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할 줄 아는 귀한 품성이다. 하지만 야생의 짐승은 숲에서 살아야 마땅하다. 사람의 방 안에 들여놓고 사람의 음식을 먹인다고 해서 짐승의 본성이 사람으로 변하지 않는다.

당신이 아무리 따뜻한 방을 내어주고 지극정성을 쏟아도, 그는 언제든 당신의 가장 약한 목덜미를 물어뜯을 준비를 멈추지 않는다.

당신의 사랑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타인의 뿌리 깊은 결핍을 당신의 헌신으로 뜯어고칠 수 있다는 허영심은 이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낫다.

그 처량하게 떨리는 눈빛에 속아 다시 방문을 열어주지 마라. 짐승에게 물어뜯긴 상처를 꿰매고 엉망이 된 방을 치우는 건 오롯이 당신의 몫으로 남는다.

피 흘리며 같이 쓰러지기 전에 그 짐승을 원래 있던 차가운 길거리로 내보내야 한다. 미안해하며 눈물 흘릴 이유가 없다. 그는 당신의 방 밖으로 쫓겨나자마자 기가 막히게 다른 따뜻한 집을 찾아낼 거다.

다시금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표정으로 다른 이의 문을 두드릴 테니까. 뒤도 돌아보지 말고 현관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면 그만이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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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진 소장 저 | 북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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