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박정원 기자 = 정부가 중동 사태 이후 급등한 국내 기름값을 잡기 위해 석유제품 가격에 상한선을 설정하는 ‘석유 최고가격제’를 13일 전면 시행했다. 지난 1997년 석유 가격 자유화 이후 약 30년 만에 처음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재정경제부 등에 따르면 석유제품 최고가격 지정 고시는 이날 오전 12시부터 발효됐다. 정유사가 주유소와 대리점 등에 공급하는 도매가격을 기준으로, 보통휘발유는 리터당 1724원, 자동차용 경유는 1713원, 실내등유는 1320원이 상한선으로 설정됐다.
이는 최근 정유사 평균 공급가격보다 휘발유는 100원 이상, 경유는 200원 이상 낮은 수준이다. 정부가 전국 1만3000여개 주유소의 소매가격을 일률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정유사의 도매 공급가격에 상한을 적용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엑스(X, 옛 트위터)를 통해 “오늘부터 석유 최고가격제를 전면 시행한다”며 “불안정한 국제 정세로 요동치는 국내 기름값을 잡기 위해 공급가격에 분명한 상한선을 두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일부 업체가 어수선한 틈을 타 폭리를 취하거나 부당이득을 챙기는 일이 없도록 국민 여러분의 감시와 참여가 필요하다”며 “만약 제도를 어기는 주유소 등을 발견하신다면 지체 없이 저에게 신고해 달라”고 당부했다.
정부가 가격 규제라는 강수를 꺼내든 배경에는 원유 도입 단가가 오르지 않은 상황에서도 국내 판매가격이 과도하게 상승한 현실이 있다.
지난달 27일 리터당 1693원이었던 전국 주유소 휘발유 가격은 지난 12일 기준 1903원으로 12.4% 급등했다. 경유는 같은 기간 리터당 1592원에서 1924원으로 20.9%나 폭등했다. 국제유가가 국내 가격에 반영되기까지 통상 2주가량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정유사들이 가격을 선제적으로 올린 측면이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지난 11일 국회에서 “원유 도입 단가는 2월27일 이전 싼 가격으로 들어왔는데도 어느 순간 판매가격이 급격하게 올라갔다”며 “이걸 그냥 둬서는 안 된다. 과도한 폭리를 취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고가격제 시행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서비스 ‘오피넷’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기준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883.8원으로 전날보다 약 15원 하락했다. 경유는 하락 폭이 더 커 전날보다 21원가량 내린 리터당 1897.9원을 기록했다. 경유 전국 평균 가격이 1800원대로 내려온 것은 중동 사태 이후 처음이다.
서울 지역에선 하락세가 더욱 두드러졌다. 서울 평균 휘발유는 리터당 1906.4원으로 전날 대비 20.7원, 경유는 30.6원 하락한 1905.5원을 나타냈다. 충남 일부 지역에서는 경유를 리터당 1500원대 후반에 판매하는 주유소도 등장했다.
이번 석유 최고가격제는 역대 정부의 유가 대응 수단 가운데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조치로 평가된다. 과거 정부들도 국제유가 급등기마다 다양한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시장가격 자체에 상한선을 설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0년대 중반 중국 등 신흥국의 원유 수요 폭증으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던 시기, 노무현정부는 유류세 10% 인하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2008년 초 휘발유와 경유에 붙는 세금을 10% 낮추는 한편, 공공기관 승용차 홀짝제 운행 등 범국민적 에너지 절약 캠페인을 펼쳤다.
세금 감면을 통해 소비자 부담을 줄이되, 수요 억제를 병행하는 ‘투트랙 전략’이었다.
이명박정부 시절에는 유가가 사상 최고치(두바이유 기준 배럴당 140달러 돌파)를 기록하며 더 강력한 처방이 요구됐다. 정부는 유가 환급금 제도를 도입해 근로자와 자영업자 약 1400만명에게 총 2조6500억원 규모의 현금을 직접 돌려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이와 함께 정유사 간 경쟁을 유도해 기름값을 낮추겠다는 취지로 ‘알뜰주유소’ 정책도 이때 탄생했다. 세금 감면을 넘어 직접적인 현금 지원과 유통 구조 개선까지 나선 것이다.
가장 최근에는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공급망 병목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겹치며 유가가 다시 치솟았다. 문재인정부와 윤석열정부는 법정 최대 인하 폭인 37%까지 유류세 탄력세율을 낮추는 역대 최대 규모의 세금 감면으로 대응했다.
이처럼 역대 정부의 유가 대응은 ‘유류세 인하 → 현금 환급·알뜰주유소 → 역대 최대 폭 세금 감면’으로 점차 강도가 높아져 왔다. 이번 석유 최고가격제는 그 연장선상에서, 세금 조정이나 보조금을 넘어 시장가격 자체에 직접 개입하는 한 단계 더 강한 수준의 조치인 셈이다.
다만 이번 대책에 유류세 추가 인하는 포함되지 않았다. 정부는 유류세 인하 카드를 현 단계에서는 꺼내지 않되, 상황이 악화될 경우를 대비한 ‘다음 단계’ 수단으로 남겨둔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인 물가 안정 효과는 확실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정유사의 공급가 인하가 주유소 판매가 하락으로 이어지며 서민 경제의 부담을 덜어줄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가격 규제가 장기화될 경우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가격 상승이 억제되면 불필요한 수요가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시장의 자율 조절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중동 사태가 장기화하고 국제유가가 계속 오를 경우, 최고가격제만으로는 가격 안정에 한계가 있을뿐더러 생산자 손실보전을 위한 재정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기룡 재경부 차관보는 12일 브리핑에서 “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보고 최후의 수단을 단기적으로라도 강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며 “유가가 오르면 물류비에 영향을 미치고, 식품 등 다른 분야로 확산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국제유가 동향과 국내 가격 상황을 지켜보며 2주 단위로 최고가격을 재설정한다는 계획이다. 국제유가가 지속 상승할 경우 국제 석유제품 가격 변동률에 따라 상한선을 상향 조정할 수 있으며, 시중 판매가격이 안정될 경우 최고가격 지정 해제도 검토될 예정이다.
<jungwon933@ilyosisa.co.kr>
Copyright ⓒ 일요시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