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고르던 참이다. 옆에 앉은 그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내민다.
- - “나 내일 출장 가는 기차표 예매해야 하는데, 앱이 자꾸 에러가 나. 네가 좀 해주면 안 될까?”
화면을 받아보니 별다른 문제도 없다. 그냥 본인이 다시 로그인해서 결제 버튼만 누르면 끝날 일이다. 툴툴거리면서도 손가락은 이미 익숙하게 그의 기차표를 끊어주고 있다. 그가 안도하는 얼굴로 어깨에 기대며 고맙다고 속삭인다.
- - “진짜 너 없으면 난 아무것도 못 해. 어떻게 살았나 몰라.”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진다. 이 큰 덩치를 하고서 나 없이는 사소한 예약 하나 못하는 이 사람이 묘하게 귀엽고 짠하다. 세상 밖에서는 번듯하게 제 몫을 다하는 어른이 내 품 안에서만 무장해제된다는 짜릿한 기분마저 든다. 내가 이 사람의 일상을 챙기고 돌봐줘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는다.
무기력이라는 영리하고 끈적한 그물
내현성 나르시시스트가 보여주는 서툰 모습은 꾸며낸 엄살에 가깝다. 자기가 하기 귀찮거나 책임지기 싫은 일 앞에서만 기가 막히게 무능해진다. 혼자서 밥을 차려 먹거나, 데이트 코스를 짜거나, 복잡한 서류를 처리하는 일상적인 과업 앞에서 갓난아기처럼 손을 놓아버린다.
- - “네가 나보다 이런 건 훨씬 꼼꼼하게 잘하잖아. 난 맨날 실수만 하고.”
자신의 흠을 인정하며 상대를 치켜세우는 척한다. 속내는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내가 고민하고 책임져야 할 귀찮은 일들을 네가 다 떠맡아라’라는 뻔뻔한 선언이다.
칭찬에 약하고 책임감이 강한 당신은 기꺼이 그물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식당 예약을 대신하던 것이 어느새 그의 인간관계 경조사를 챙기고 가족 선물까지 골라주는 지경에 이른다.
챙겨주지 않으면 그가 굶거나 큰일이 날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돕는 게 아니라 당신이 그의 수족이 되어 땀 흘리며 대신 걷고 있다.
대체 불가능하다는 달콤한 착각
관계가 길어지면 서서히 착각의 늪에 빠져든다. 나만이 이 사람을 감당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이 사람이 나 없이는 정말 아무것도 못할 거라는 묘한 보호본능이 일상을 지배한다.
누군가의 보호자가 된다는 건 으스대기 좋은 위치다. 상대를 내 통제 아래 두고 돌보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안도감을 느끼니까. 실상은 당신의 진을 빼놓는 지독한 착취 구조다.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다 큰 어른의 보모 노릇을 자처하고 있다.
당신의 에너지는 서서히 바닥을 드러낸다. 정작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이나 휴식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그의 밀린 집안일을 돕거나 하소연을 듣느라 밤을 지새운다.
그 사람의 앙상한 삶을 지탱하느라 내 일상이 부서지고 있다. 억울해서 미칠 것 같다가도 그가 불쌍한 표정으로 쳐다보면 다시 마음이 흔들린다. 내가 손을 놓아버리면 이 불쌍한 사람이 당장 길바닥에 나앉을 것 같아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버틴다.
감정의 대소변까지 치워야 하는 노동
이들의 무기력은 단지 물리적인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감정 조절조차 스스로 하지 못해 당신에게 온전히 기댄다. 회사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거나 친구와 다투고 온 날, 그는 씻지도 않고 소파에 널브러져 온 집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힌다.
스스로 기분을 환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우울하고 짜증 나는 상태 그대로를 당신 앞에 던져놓고 해결해 주기를 기다린다. 아이가 바지에 오줌을 싸놓고 엄마가 치워주기를 바라며 울고 있는 것과 똑같다.
- - “나 오늘 진짜 최악의 하루였어. 네가 재밌는 얘기 좀 해봐.”
당신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억지로 웃으며 그의 기분을 띄워주려 애쓴다. 맛있는 것을 배달시키고 어깨를 주물러주며 감정의 대소변을 묵묵히 치워낸다.
연인의 기분을 살펴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들에게는 그것이 맡겨놓은 물건을 찾는 듯한 뻔뻔한 권리다.
헌신이 원망의 화살로 돌아오는 찰나
모든 걸 다 해주는 매니저 노릇의 끝은 비참하다. 당신이 완벽하게 그의 일상을 통제하고 챙겨주다가 단 한 번 틈을 보이는 순간 본색이 드러난다. 깜빡하고 그가 부탁한 세탁물을 찾아놓지 않았거나, 당신이 고른 식당의 맛이 형편없을 때 그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돌변한다.
- - “네가 알아서 다 해준다고 했잖아. 이것도 하나 제대로 못 챙겨서 내 주말을 망쳐?”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든다. 이 말은 당신의 선의를 짓밟는 무자비한 폭력이다. ‘네가 스스로 내 매니저 역할을 자처했으니 결과가 잘못된 것도 전부 네 책임이다’라고 뒤집어씌우는 거다.
고마워하기는커녕 당당하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며 억장이 무너진다. 애초에 본인이 해야 할 일이었다. 당신이 호의로 대신해 준 건데 어느새 의무로 둔갑해 있다.
해주고도 욕을 먹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끊임없이 눈치를 본다. 다음에 또 실수해서 그를 실망하게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더 완벽한 보호자가 되려 안간힘을 쓴다.
허울뿐인 보모의 앞치마를 벗어던질 때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거라는 생각은 완벽한 오산이다. 당신이 나타나기 전에도 그는 멀쩡히 살았다. 당신이 떠난 뒤에도 기가 막히게 다른 사람을 찾아내 똑같이 기대며 살아갈 거다.
스스로 걷지 못하는 게 아니다. 걷기 귀찮아서 당신의 등에 업혀 있는 거다. 등에 찰싹 달라붙어 당신의 체력과 감정을 갉아먹으며 편하게 목적지까지 이동하고 있을 뿐이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게 낫다. 그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 스스로 챙겨야 마땅하다. 연애는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가며 나란히 걷는 거지, 한 사람을 등에 업고 숨을 헐떡이며 오르막길을 오르는 고행이 아니다.
안쓰러워하는 마음을 거둬들여라. 챙겨주지 않아서 그가 끼니를 거르든 서류를 망치든 내버려 두면 된다. 다 큰 어른의 징징거림을 받아주는 보모의 앞치마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홀가분한 맨몸으로 문을 나서면 그만이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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