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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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기록

노블레스 2026-03-12 09:00:00 신고

앤트레디션 인 비트윈 체어 8COLORS

김춘미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교에서 MFA를 마쳤다. 현재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최근 서울 N/A갤러리, 런던 지니 온 프레더릭, 뉴욕 폴 소토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서울, 빈, 런던 등 세계 각지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루벨 뮤지엄을 비롯해 미국, 영국, 한국 등 여러 국가의 공공 및 개인 컬렉션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2024년 N/A갤러리에서 열린 〈Ship Snow〉전 전경.

런던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계시죠. 그곳에서 일상은 어떻게 흘러가나요? 생활은 꽤 단순한 편이에요. 평일에는 거의 작업실에 있고, 작업이 몰릴 때는 주말까지 나가기도 하죠. 가능하면 작업실까지는 걸어가려고 해요. 30분 정도 걷다 보면 머리가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느낌이 들거든요. 작업실에 도착하면 오전에는 밀린 이메일을 정리하고, 그 후 저녁 전까지 계속 작업에 집중합니다.

작업 환경으로 런던은 작가님께 어떤 영향을 주나요? 날씨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런던에 오래 머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날씨인 것 같아요. 정확히 말하면 날씨가 만들어내는 무드라고 할까요. 런던은 날씨 변화가 정말 빠르잖아요. 묵직하고 촉촉한 날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해가 쨍하고 나오기도 하죠. 그런 다이내믹함이 좋아요. 오히려 작업에도 도움이 되고요.

말씀하신 날씨를 비롯한 환경이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작품을 보다 보면 꽃이나 나뭇가지, 풀 같은 자연의 이미지가 떠오르거든요. 색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제가 원색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고, 의도적으로 흰색은 조금 자제하거든요. 그런 투명한 프라이머리 컬러가 아무래도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에 가깝다고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또 어린 시절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최근 그때의 기억을 자주 떠올리는데, 그 기억 속에는 일상적 장면도 있지만 대자연 속에서 보낸 경험이 꽤 많이 남아 있거든요. 그 기억들이 제 창작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2023년 런던 지니 온 프레더릭에서 열린 〈Acid-Freeee〉전 전경.

어린 시절 마주한 자연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제가 경험한 자연은 배경처럼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저 보기 좋은 풍경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며 배우는 존재에 가까웠죠. 어릴 때 조부모님께서 서해의 한 섬에서 사셨는데, 그곳의 바다는 아름답기만 한 대상은 아니었어요. 밀물과 썰물이 극단적으로 바뀌고, 안개가 끼고 바람이 불고, 때로는 조금 무섭기도 했죠. 그런 변화를 그대로 겪으며 자랐어요. 그래서인지 그때의 감각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장면의 색감과 냄새, 손에 남아 있던 모래의 촉감 같은 거요. 자연을 ‘보았다’기보다는 ‘겪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아요. 그런 통제할 수 없는 힘 앞에서 생기는 긴장감이나 리듬 같은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며 자란 것 같아요.

그런 경험의 영향일까요. 작품에서 유려한 선과 그 안에 흐르는 리듬이 특히 강하게 느껴집니다. 만약 제가 어떤 대상을 재현하려 했다면 선보다는 면을 만들어가며 그렸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자연스럽게 계속 선을 쓰고 있더라고요. 그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어릴 적 배운 서예의 영향도 큰 것 같습니다. 서예는 먹물 한 방울만 실수로 떨어뜨려도 종이를 버려야 하잖아요. 그 되돌릴 수 없음, 그 자체의 긴장감에 매력을 느낀 것 같아요. 페인팅이라는 매체를 선택한 것도 어떻게 보면 붓이 제게 자연스럽게 주어진 도구라는 감각 때문이었고요. 붓을 활용하는 방식 자체에 흥미를 느끼다 보니 그런 선이 계속해서 작품에 등장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화면에서 느껴지는 투명함 역시 중요한 요소로 보입니다. 이런 회화적 기법에 끌리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저는 뭔가를 계속 쌓아 올리는 방식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투명함이라는 물질성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결국 작업 과정이 화면에 드러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스스로 되짚어볼 수 있고, 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흐름이 자연스럽게 읽히는 그림에 끌리거든요. 그러려면 이전의 붓질이 가려지지 않고 남아 있는 흔적의 레이어를 통해 그 과정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하죠.

The Necklace, Oil on Canvas, 60×160cm, 2024.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흐름이 궁금합니다. 일단 제 생각이 유연해진 상태여야 시작할 수 있어요. 페인팅에서 보여주고 싶은 자유로움의 형태는 경직된 상태에서는 나오지 않거든요. 그림을 그리기 전 긴장을 풀어주는데, 걷거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혼자 풍경을 바라보거나 심지어 설거지를 할 때도 불현듯 형상이 떠올라요. 그러면 ‘아, 내일은 여기에 이걸 넣어야겠다’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죠. 이미 그림에 제가 그려놓은 것이 있고, 그걸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하면서 작업을 이어가게 됩니다. 하나씩 문제를 풀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끝나 있어요. 마무리 역시 많은 페인터가 그리 말하듯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는 순간이 오죠. 이건 이제 즐기는 단계가 아니라 감상하는 순서구나 하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때 작업을 끝내는 것 같아요.

추상 표현의 궁극적 목표가 자유로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유로움’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 굉장히 막연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늘 ‘어떤 자유로움의 형태를 말하고 싶은 걸까?’, ‘그게 무엇일까?’ 생각해요. ‘과연 페인팅이라는 매체를 통해 정말 자유로운 상태를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계속 떠오르고요. 왜냐하면 작업은 결코 마냥 자유롭진 않거든요. 제가 어떤 이야기나 구체적 소재를 가지고 작업하는 편은 아니다 보니 결국 페인팅 자체를 통해 ‘나라는 사람은 이걸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마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작업을 하다 보면 어떤 이름 없는 세계와 연결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거든요. 그게 제 머릿속에 있는 세계인지, 아니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세계인지는 모르겠어요. 몇 차원 세계인지도 알 수 없고요. 다만 분명한 건 그런 이름 없는 세계와 연결되는 감각 자체가 굉장히 불확실하다는 점이에요. 추상적 개념이나 쉽게 논리로 풀리지 않는 감정 같은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그런 감각을 다루기 위해 추상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A Snow Settler, Oil on Canvas, 170×150cm, 2024.

다가오는 봄 리안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계시죠. 이번 신작에는 문자라는 요소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작업에서 어떤 전환을 의미할까요? 저는 늘 ‘쓰는 행위’처럼 신체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었어요. 같은 동그라미라도 추상적인 원의 형태와 한글의 ‘ㅇ’을 생각하고 쓸 때는 분명히 다르더라고요. 어떤 날에는 선을 그리면서도 마치 쓰고 싶은 것을 풀어내듯 작업할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이 명확한 문장은 아니에요. 오히려 무엇을 쓰고 싶은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 가깝죠. ‘쓰는 것과 그리는 것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그 차이는 무엇일까?’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서예를 배운 경험도 크게 작용한 것 같아요. 붓이라는 도구로 선을 긋다 보면 어느 순간 분명히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감각이 생길 때가 있거든요. 흥미로운 건 문자가 등장하는 순간 관람객은 자연스럽게 읽으려는 태도를 갖게 된다는 점이에요. 제 작업은 늘 물음표를 남기는 쪽에 가까운데, 그 명확함과 모호함 사이의 긴장감을 흥미롭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어떤 경험을 하길 바라나요? 제가 좋아하는 전시나 작가들의 작업을 떠올려보면 막상 왜 좋았는지 정확하게 말하지 못할 때가 많더라고요. 질문이 많이 생기고 약간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좋아지는 상태랄까요. 한번은 어떤 중년 여성 관람객이 제 작은 그림을 한참 보다가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어릴 적 고모 댁에 놀러 간 기억이 있는데, 버스를 타고 갈 때 문득문득 떠오르던 그 장면이 제 그림을 보는 순간 갑자기 생각났다고 하시더라고요. 말씀하면서 잠시 울컥하시는 걸 보며 저도 이유 없이 그림에 끌릴 때 늘 제 개인적 기억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왔다는 걸 다시 느꼈어요. 그래서 제 작품을 관람하는 분들 역시 개인적 기억이나 감정과 만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앞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요? 조각에 대한 미련이 있어요. 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관심사인데,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조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제 마음의 준비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을 때 꼭 한번 시도해보고 싶은 영역이에요.

Ringing, Oil on Jute, 190×340cm,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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