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줄 평
“언제든 울 준비가 되어 있는, 젊은 치기가 재미있다.”
▲시 한 편
<흐이히히히잉> - 부영우
나는 당나귀
짐수레를 끌고 어디로든 가라 하면 가겠어
딸랑 종을 흔들며 그저 갈 테니
다리 꼬고 앉아 피리라도 불어
그렇지만 아무도 없는 샛길 건널목
빨간불에 건너라고 하면
채찍을 후려쳐도 안 가겠어
노랑꽃이 흔들리고 있잖아
생각이 날 듯해서 그러는 거야
질겅질겅 되새김질하다 떠올랐지
사거리 같은 데서 비켜서 있었던 거
산등성이 너머로 눈길 주고 있었던 거
가는 새라도 눈에 들어오면 히죽 웃기도 하였던 거
그때 내가 뭐였는지 몰라도
기다리는 마음, 그것대로 괜찮았지
내 발목이 튼튼한 걸 보면
많이 걷기를 바라긴 바랐나 봐
힝힝,
노랑꽃아, 노랑꽃아,
노랗기를, 노랗기를 오래 기다렸니?
또 무엇을 기다리며
까르르 몸을 떠니?
▲시평
이 시의 첫 행 “나는 당나귀”는 자연스럽게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떠올리게 한다. 당나귀를 사랑한 대표적인 시인이 백석이고, 요즘 시에 당나귀가 자주 등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말이 빠른 속도를 추구한다면 당나귀는 느린 속도를 지향한다. 작은 체형이지만 튼튼한 다리로 목적지를 향해 느긋하게 움직인다. 당나귀는 산책이나 사색의 시간과 어울리는 동물이다. 짐수레 위에서 “다리를 꼬고 피리”를 부는 풍경과 딱 어울린다. 백석의 시에서 당나귀가 세속을 거부한 낭만적 사랑의 도피 수단이라면, 이 시에서 당나귀는 일상의 실존적 저항과 기다림을 상징한다. “어디로든 가라 하면”, 시키는 대로 하는 순응적인 존재다. 하지만 “빨간불에 건너라고 하면”, 즉 위험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시키면 복종을 거부한다. 채찍질 같은 폭력에도 완강히 저항한다. 단순한 고집이 아닌 윤리적 기준이나 자신만의 철칙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순응과 저항의 존재였던 당나귀는 “노랑꽃이 흔들리”는 순간 잊었던 기억과 추억을 환기한다. 존재 가치에 대한 각성이기도 하다. “건널목/ 빨간불”과 대비되는 “노랑꽃”은 기존 사회의 질서 체계에서 소외된 작고 연약한 존재다. 백석의 시가 푹푹 내리는 눈이나 흰 당나귀라는 흰색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듯, 이 시는 빨간불과 노랑꽃을 통해 일상의 공간인 “사거리”나 “산등성이 너머”를 서정적 공간으로 환치한다. “샛길 건널목”과 “노랑꽃”은 “기다리는 마음”을 소환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생각만으로 “히죽 웃기도” 하는 거로 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사랑하는 순간에는 “내가 뭐였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절대복종해도 그저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 시 제목에도 나타나듯, 의성어도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백석의 시에서 당나귀는 “좋아서 응앙응앙” 울지만, 이 시의 당나귀는 기다리며 “힝힝” 운다. 또 “까르르 몸을” 떤다. 순응과 복종이라는 현실적 제약에도 자아를 지켜내려는 단단한 고집이 돋보인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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