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디의 새로운 챕터는 의외로 간결한 문장으로 시작됐다. ‘Less I, more us.’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가 펜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처음 선보인 ‘펜디 2026 가을 겨울 컬렉션’을 관통하는 메시지다. ‘나보다 우리.’ 패션이 오랫동안 한 사람의 이름으로 움직여온 산업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 슬로건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방향 전환처럼 들린다. 개인의 서사를 강조하는 패션 시스템에서 한 걸음 물러난다. 옷이 만들어지는 관계와 협업의 구조를 다시 바라보겠다는 태도다. 동시에 키우리가 말하는 ‘우리’는 훨씬 구체적인 장면에 가깝다. 친구와 오랜만에 만난 자리, 함께 걷는 저녁 산책, 서로의 옷을 빌려 입는 사소한 순간들. 그녀의 세계에서 옷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사람 사이의 경험과 기억을 축적하는 매개다.
펜디는 키우리에게 낯선 하우스가 아니다. 이번 행보는 고향 로마로 돌아오는 일이기도 하다. 동시에 자신의 커리어가 시작된 자리로의 복귀다. 키우리는 1989년 스물네 살의 나이에 펜디 액세서리 부서에 합류했다. 이후 발렌티노에서 피에르파올로 피촐리와 함께 약 10년 동안 하우스를 이끌었다. 그리고 2016년, 디올의 첫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됐다. 이 시기 그녀는 패션계 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가운데 한 명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지금 다시 펜디로 돌아왔다.
이번 컬렉션을 준비하며 키우리는 브랜드의 시작점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모가 운영하던 모피와 가죽 공방을 이어받아 세계적인 하우스로 성장시킨 다섯 자매의 이야기다. 창립자 아델 카사그란데 펜디는 딸들에게 이 말을 늘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너희는 손의 다섯 손가락과 같다.” 서로 다른 역할을 하더라도 결국 하나의 손처럼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회사의 중요한 결정은 다섯 명 가운데 네 명이 동의해야 통과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엄격하면서도 협력적인 이 구조는 펜디라는 하우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장면처럼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컬렉션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펜디를 이끌어온 다섯 자매의 창조적 연대를 환기시킨다. ‘Less I, more us.’
이런 배경 속에서 키우리의 복귀 신고식과 다름없는 컬렉션은 놀라울 만큼 절제된 방식으로 전개됐다. 최근 몇 시즌 동안 런웨이가 점점 더 극적인 이미지와 디지털 소비를 겨냥한 장면에 집착했다. 그에 비하면 키우리의 접근은 의도적으로 차분해 보였다. 런웨이에 적힌 슬로건 “Less I, more us”은 또 하나의 오래된 문장을 불러냈다. “Less is more.” 쇼의 첫 룩은 놀라울 만큼 절제된 올 블랙 실루엣이었다. 깊게 열린 브이넥 드레스는 재킷의 구조를 닮은 테일러링으로 완성됐다. 장식은 거의 배제됐다. 블랙 양말과 힐 그리고 바게트 백. 그 조합만으로도 이번 컬렉션의 방향은 충분히 짐작됐다.
컬렉션의 색채는 전반적으로 모노크롬 팔레트였다. 블랙, 화이트, 베이지. 카키 코트와 레드 슬립 드레스를 비롯해 몇 가지 컬러 포인트가 등장하긴 했다. 하지만 중심은 실루엣과 소재였다. 남성과 여성 모델에게 거의 동일한 테일러드 수트를 반복적으로 입힌 것도 인상적이다. 동일한 디자인을 공유했고 실루엣과 비율만 미묘하게 달랐다. 옷을 우리의 감정, 욕망과 함께하는 존재로 바라보지, 특정한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기지 않는 키우리의 관점은 여전했다. 컬렉션의 또 다른 중심에는 드레스들이 있었다. 잉크처럼 깊은 실크와 발레 슈즈를 연상시키는 누드 톤 시스루 소재. 그리고 몸의 선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실루엣. 드레스들은 몸의 움직임이 디테일로 변모했다. 말하자면 이번 컬렉션은 몸을 통제하거나 억지로 변형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몸 자체의 움직임과 감각으로 돌아간다.
펜디의 옷장은 현실적인 세계로도 확장됐다. 라이더 재킷, 파카 코트, 데님, 카고 팬츠에 이어 카모플라주 디테일과 보일러 수트 등 보다 실용적인 옷들이 등장했다. 큼직한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가 여기에 방점을 찍었다. 단어는 단 하나, “NO.” 간결하지만 여러 의미를 내포한 게 틀림없다.
펜디의 역사와 연결되는 요소도 컬렉션 곳곳에 스며들었다. 퍼는 티펫과 칼라, 여러 조각을 이어 만든 패치워크 코트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선보였다. 대부분 기존 아카이브 소재를 업사이클링해 제작된 것들이었다. 하우스의 전통과 현재를 잇는 나름의 제스처처럼 보였다. 그중 작은 화이트 레더 칼라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수트와 드레스 위에 초커처럼 착용돼 칼 라거펠트를 떠올리게 했다. 50년 넘게 펜디와 함께했던 아이코닉한 디자이너에게 건네는 점잖은 인사랄까.
물론 이번 컬렉션에서 바게트 백도 빼놓을 수 없다. 캔버스, 가죽, 비즈 프린지 장식 등 다양한 버전으로 다시 등장했다. 키우리가 1990년대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와 함께 이 가방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묘한 순환처럼 느껴진다. 여기에 “5 Sisters” 자수가 들어간 니트 스카프가 더해졌다. 하우스의 역사가 다시 읽혔다.
펜디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하우스의 워드로브를 새롭게 꾸린다기보다 재정렬했다. 코트와 재킷, 드레스와 가방이 서로 다른 시간과 세대를 지나며 다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이번 컬렉션은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를 내세우기보다는, 펜디라는 하우스가 오랫동안 쌓아온 옷의 결을 다시 바라보는 시도에 가깝다.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키우리는 이 하우스의 다음 장을 차분히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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