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이 사상 처음으로 의약품 수출 100억달러 시대를 열며 외형 성장에 성공한 가운데, 산업을 둘러싼 글로벌 환경은 빠르게 흔들리고 있다. 중국 바이오 산업의 급부상과 중동 지역 지정학 리스크가 동시에 나타나면서 K제약 산업이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국내 바이오헬스 산업 수출은 279억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의약품 수출은 104억달러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100억달러를 넘어섰다. 바이오의약품 수출 확대와 글로벌 시장 진출이 맞물리면서 최근 10년간 의약품 수출 규모는 약 10배 성장했다. 반도체·자동차에 이어 차세대 수출 산업으로 자리 잡을 것이란 의견이 우세하다.
한국은 글로벌 임상시험 시장에서도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해외 제약사의 국내 임상시험 승인 건수는 2024년 359건에서 지난해 409건으로 약 14% 증가했다. 글로벌 제약사의 국내 임상 연구 투자 규모도 1조369억원으로 2020년 대비 약 74% 늘었다. 대형 의료기관 네트워크와 빠른 환자 모집 속도, 비교적 낮은 임상 비용 등이 글로벌 기업들의 한국 선택을 이끌고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글로벌 경쟁 환경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중국 제약바이오 산업 성장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고,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인 미국과의 격차도 크게 좁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제약협회 자료에 따르면 중국 기업의 혁신신약 임상시험 점유율은 2015년 4%에서 지난해 30%까지 급등했다. 같은 기간 미국 기업의 점유율은 46%에서 33%로 낮아지며 양국 간 격차도 10년 전 42%포인트에서 최근 3%포인트까지 좁혀졌다.
임상시험 속도와 비용에서도 중국의 경쟁력은 빠르게 강화되는 모습이다. 종양 분야 임상 1상 기간은 미국 평균 26.2개월인 반면 중국은 17.2개월에 그친다. 비용 역시 임상 1상 기준 미국보다 30~50% 저렴하다. 업계에서는 중국이 단순 복제 의약품 생산국을 넘어 글로벌 신약 개발 경쟁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중동 지역의 지정학 리스크까지 겹치며 산업 환경의 불확실성은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과 이란 간 군사 충돌로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글로벌 에너지와 물류 시장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발 중국행 유조선 운임은 연초 대비 17배 이상 급등했고, 국제 유가도 배럴당 100달러 선을 넘어섰다.
이 같은 변화가 제약 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바이오의약품은 온도 유지가 필수적인 콜드체인 물류에 의존하는데 중동 항공 노선 축소와 우회 운항이 늘면서 운송 비용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특히 백신과 항체치료제 등 고부가가치 바이오의약품은 항공 물류 의존도가 높아 운임 상승이 곧바로 가격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중동 시장 자체도 중요한 변수로 거론된다. 최근 몇 년 사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를 중심으로 의료 인프라 투자와 미용 의료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중동은 ‘파머징 마켓(Pharmerging Market)’으로 불리며 글로벌 제약사들의 주요 전략 시장으로 떠올랐다.
국내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진출해 왔다. 메디컬 에스테틱 분야에서는 대웅제약의 보툴리눔 톡신 ‘나보타’, 휴젤의 ‘보툴렉스’, 메디톡스의 필러 ‘뉴라미스’ 등이 중동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전문의약품 분야에서도 한미약품과 HK이노엔이 사우디 제약사 타부크와 협력해 각각 ‘롤론티스’와 ‘케이캡’을 공급, 치과용 임플란트 기업 오스템임플란트 등도 현지 법인을 통해 중동 시장을 확대해 왔다.
다만 모든 기업이 동일한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해석도 나온다. 중동 시장 공략에 적극적이었던 메디컬 에스테틱 기업과 달리 일부 전통 제약사는 중동 매출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국내 주요 제약사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유럽·동남아 시장 비중이 높고 국내 처방 의약품 매출 의존도도 여전히 높은 편이다.
특히 전문의약품 중심 사업 구조를 가진 기업들의 경우 중동 전쟁 영향이 제한적일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메디컬 에스테틱 기업들은 중동 시장 비중이 높아 물류나 수요 위축의 영향을 직접 받을 수 있지만 일부 전통 제약사들은 매출 구조상 영향이 크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며 “기업별 사업 포트폴리오에 따라 체감 리스크가 상당히 다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산업 전반으로 영향이 확산될 수 있는 가운데 물류와 수요 양측에서 리스크가 동시에 커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해상 운송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될 경우 글로벌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영향을 받는다. 항공 운송 역시 항로 변경과 운임 상승이 불가피해지면서 바이오의약품 운송 비용이 크게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료의약품 자급률이 낮은 국내 제약 산업의 구조적 취약점도 불안 요인으로 꼽힌다. 국내 원료의약품 자급률은 2023년 기준 25.6%에 불과하다. 상당수 원료를 해외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인 만큼, 유가 상승이나 글로벌 공급망 충격이 발생할 경우 생산 비용이 크게 증가할 수 있다.
실제 의약품 공급 부족 문제도 이미 확대되는 추세다. 공급이 중단되거나 부족한 의약품은 2014년 57개에서 2023년 265개로 4.7배 증가했다. 국가필수의약품 역시 최근 5년간 108개 품목에서 공급 중단 사례가 발생했다. 이에 정부도 대응에 나섰다. 보건복지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 부처는 중동 정세 악화에 따른 산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보건의료산업 피해지원센터’를 가동,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중국 바이오 산업의 추격과 중동 지정학 리스크가 동시에 작용하면서 글로벌 제약 시장 경쟁 환경이 크게 변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직접적인 수출 비중만 보면 당장 영향은 제한적일 수 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 물류·에너지·환율 등 다양한 변수들이 동시에 작용할 수 있다”며 “기업 입장에서는 동남아나 중남미 등으로 시장 포트폴리오를 분산하는 전략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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