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최근 후기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 산모에게 살인죄 유죄가 선고됐고 수술을 집도한 의사들에게도 실형이 내려졌다. 임신중지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지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내에서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이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약물과 의료체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6일 투데이신문의 취재에 따르면 엑스(X·구 트위터) 등 일부 SNS에서는 여전히 임신중지약이 거래되고 있다. 주로 거래되는 약물은 먹는 유산유도제 미프진(Mifegyne)으로 초기 임신 유지에 필요한 호르몬을 차단해 자궁 수축을 유도한다.
미프진은 세계보건기구(WHO)가 2005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한 약물로 미국·영국·프랑스 등 100여 개국에서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불법으로 규정돼 인도와 중국에서 생산된 제품이 밀수입돼 유통되는 실정이다.
문제는 인도산과 중국산 제품의 용량과 복용 방법이 각각 다름에도 이러한 차이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은 채 무분별하게 거래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국내에는 이를 관리할 제도적 장치와 시설이 전무해 유통 과정은 물론 생산 공정에 대한 관리도 사실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임신중지죄가 2019년 4월 11일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뒤 약 7년의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까지도 입법 공백이 이어지고 있어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이들은 성분과 부작용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는 불법 약물을 수십만원에 이르는 웃돈을 주고 구매하거나 임신중절 수술을 받아야 한다.
입법공백 기간이 길어지면서 여성들은 임신중지에 대한 정보 접근 자체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 3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간한 ‘입법공백 시기 여성의 임신중단 인식과 경험 연구’에 따르면 임신중지를 고려하거나 경험한 여성들은 대부분 인터넷, SNS를 통해 관련 정보를 얻었다.
또 여전히 정식 의료기관을 통한 임신중지는 어려웠고 역으로 미프진 등 유산유도제에 대한 인지와 도입에 대한 기대는 높아지면서 온라인 등을 통한 약물 구매가 증가했다. 임신중지죄가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기 전후로 산모들에게 크게 개선된 점이 없다는 평가다.
최근 임신 36주차에 임신중절 수술을 받아 살인 등 혐의로 기소된 산모 역시 “임신 7개월이 조금 넘었을 때 복부 초음파를 하면서 알게 됐고 그 전에는 임신 사실을 전혀 몰랐다”며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 출산 후 아이를 행복하게 키울 자신이 없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재판부 역시 이 산모를 ‘위기임산부’로 보고 보호할 장치가 부족했음을 지적했다.
지난 4일 이 산모에게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됐다. 함께 기소된 병원장과 수술 집도의에게는 각각 징역 6년과 벌금 150만원, 징역 4년이 선고됐다. 환자 알선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브로커 2명은 각각 징역 1년과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국내외 인권단체는 임신중지 약물 도입을 미루고 있는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에 비판을 제기했다. 성평등가족부·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 등 부처에서 임신중지 약물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됨에도 식약처가 “약물에 의한 임신중지 허용 여부와 허용 기간이 법률로 정해져야 허가 심사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약물 허가를 내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식약처는 모자보건법에 약물에 대한 임신중지 허용 여부와 임신중지 허용 기간이 주 단위로 상세히 명시돼야 유해성 평가에 나설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이 식약처로부터 제출받은 법률 자문서에 따르면 식약처는 “법 개정 여부와 무관하게 인공임신중절 의약품의 품목허가는 가능하며 이에 따른 수입 및 유통 또한 합법적”이라는 자문을 받았다.
더불어 “품목허가를 거부할 근거가 규정되어 있지 않은 이상 거부 처분은 위법에 해당한다”는 의견과 “기준이 없다는 이유로 허가를 거부하는 것은 재량권의 일탈·남용 소지가 있다”는 판단도 제시됐다.
식약처가 모자보건법을 이유로 약물 도입을 미루고 있음에도 국회는 입법공백에 무관심한 상태다. 현재 22대 국회에는 관련 법안 4건이 발의돼 있으나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2020년 21대 국회에서는 임신중절 방법에 약물 투여를 포함한 정부안이 제출됐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이동근 사무국장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헌법재판소가 정한 대체입법 기한인 2020년 12월이 지나자 식약처는 임신중지약 심사와 허가를 신속히 처리하겠다고 밝혔으나 2022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들어선 이후 기조가 바뀌었다”면서 “현 식약처 오유경 장관은 윤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로, 아직까지 전 정부의 판단을 바꾸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 사무국장은 “비급여 임신중절 수술로 일부 의료 수가를 충당하는 산부인과의사회의 반대도 영향을 미치지만 우선 식약처가 약물 도입 허가 결정을 하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산부인과가 낮은 수가로 오랫동안 필수 진료를 하고 있음에도 경제적으로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복지부가 함께 해결해야 저항이 적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부처 간 입장 차가 여전한 데다 관련 논의가 정치 일정과도 맞물려 있는 만큼 임신중지약 도입 문제는 오는 6월 지방선거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다시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장기간 입법 공백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더 이상의 논의 지연은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을 제도권 밖의 불법 유통과 정보 공백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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