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들] '왕사남'이 소환한 단종애사…우리가 잊고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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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들] '왕사남'이 소환한 단종애사…우리가 잊고 있는 것들

연합뉴스 2026-03-06 07:5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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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에 관광객 발길, 영도교·동망봉·사릉 유래는?

단종 열풍 일회성 우려, "디지털 역사문화 벨트 검토를"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 청령포에 갇히자, 궁에서 쫓겨난 정순왕후(여산 송씨)는 동대문 밖 숭인동 산기슭에서 지냈다. 왕후는 매일 바위에 올라 남편이 있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울었고,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동쪽을 바라본다'는 뜻의 동망봉(東望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청계천 영도교에서 단종과 정순왕후의 생이별 청계천 영도교에서 단종과 정순왕후의 생이별

(서울=연합뉴스) 안정원 기자 = 서울 청계천 영도교에서 강원도 영월로 유배가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별이 무용극 형식으로 열리고 있다. 이번 행사는 종로구의 정순왕후 추모제 일환으로 열렸다.(2008년 4월26일)

▷ 단종이 역도로 몰려 죽자 왕후는 노비로 전락했다. 그녀는 세조가 내리는 식량을 거부하고, 자주동천(紫芝洞泉)이라는 샘터에서 옷감에 보라색 물을 들이는 염색 일을 하며 스스로 생계를 꾸렸다.

마을 여인들은 왕후가 관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여자만 드나들 수 있는 채소시장을 열었다. 금남(禁男)의 채소시장은 단종과 왕후가 마지막 이별을 나눈 지금의 청계천 영도교(永渡橋) 자리에 있었다. '다리를 건너면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여생을 침묵과 저항으로 버텨낸 왕후는 죽어서도 남편 곁에 가지 못하고 경기도 남양주 진건읍에 묻혔다. 훗날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키면서 왕후의 묘소명을 남편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마음을 담아 사릉(思陵)으로 정했다.

사릉에는 기이한 전설이 전한다. 묘소 뒤편 나무들이 단종의 능인 장릉 방향으로 고개를 숙인 채 자란다는 것이다. 영월 장릉의 소나무들 또한 사릉 쪽을 향해 기운다고 하니, 죽어서도 다시 만나지 못하는 두 사람의 딱한 처지를 보는 것 같다.

정순왕후가 묻힌 남양주 사릉 정순왕후가 묻힌 남양주 사릉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이 비극은 정순왕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과 경기, 강원의 땅 곳곳에 세조라는 한 비정한 권력자가 남긴 피로 물든 역사의 흔적이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종각이다. 세조는 단종 복위를 꾀한 성삼문과 박팽년 등 사육신을 의금부에서 국문한 뒤 군기감에서 사지를 찢어죽이는 거열형에 처했다.

세조는 백관을 모아 거열 장면을 지켜보게 하고 사흘간 머리를 거리에 내걸었다. 의금부는 종각역 인근 SC 제일은행 자리에, 군기감은 서울시청 자리에 있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종각역과 무교동 먹자골목이 바로 그 살육의 현장이다.

▷ 쿠데타의 실무를 설계하고 절대권력을 쥔 자는 한명회였다. 그의 전리품은 한강에도 새겨졌다. 한명회는 '갈매기와 벗한다'는 뜻으로 한강가에 정자를 짓고 압구정(狎鷗亭)이라 불렀다. 정자 터는 압구정 현대아파트 72동·74동 사이에 표지석으로만 남아 있다. 조선 초 최고 권력자의 뱃놀이 명소 자리에 오늘날 대한민국 최고 부촌이 들어선 것이다.

▷ 단종을 왕으로 만든 숙종 때로 오면 또 다른 드라마가 펼쳐진다. 궁녀 출신으로 왕비 자리까지 올랐다가 사약을 받은 장희빈, 그리고 장희빈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복위한 인현왕후. 일생의 라이벌 대결 끝에 패자가 된 장희빈의 시신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묻혔다가 1969년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으로 이장됐다. 악연으로 얽힌 세 사람이 죽어서는 같은 자리에 누운 것이다.

영월 청령포로 향하는 방문객의 발길 줄이어 영월 청령포로 향하는 방문객의 발길 줄이어

(영월=연합뉴스) 7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에 힘입어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를 찾는 방문객도 크게 늘고 있는 가운데 2월의 마지막 날인 28일 청령포로 향하는 방문객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2026.2.28 [영월군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jlee@yna.co.kr

▷ 종각역 네거리, 무교동 골목, 압구정 아파트 단지, 서오릉 오솔길이 모두 살아있는 역사 교실이다. 최근 흥행하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청령포를 검색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종각역에서 내려 무교동을 걷고 동묘앞역 인근 동망봉에 올라보길 권한다. 교과서가 전하지 못한 역사의 감각이 발밑에서 살아 움직일 것이다.

▷ '왕사남' 열풍이 조선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 불을 지피고 있다. 청령포를 찾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늘었다는 뉴스가 반갑지만, 이전에도 그랬듯 이런 관심이 일회성 소비로 끝날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이럴 때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적 뒷받침이 절실하다. 디지털을 접목한 '역사 문화 벨트'를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등 문화적 토양 조성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한 나라의 소프트파워는 발상의 전환에서 나오고, 그 지속적인 실행력은 정부의 의지에 달려있다.

j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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