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도 없이 이어지는 미우치아 프라다와 라프 시몬스의 심도 깊은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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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도 없이 이어지는 미우치아 프라다와 라프 시몬스의 심도 깊은 대화

바자 2026-03-05 08:00:00 신고


MIUCCIA PRADA & RAF SIMONS


창조적이면서 동시에 산업적인, 패션의 생산자인 동시에 예술, 건축, 영화의 창조자. 복합적인 유기체와 같은 프라다, 그 조화로운 합창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목소리로 구성되었다. 미우치아 프라다와 라프 시몬스. 뚜렷한 의견 사이를 오가는 그들의 대화와 충돌은 이 그룹이 거둔 성공의 비밀 재료다.


만약 프라다가 하나의 고체라면, 구(球)라기보다는 천 개의 차원을 가진 하이퍼큐브일 것이다.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적이기도 한. 산업적인 동시에 장인정신이 녹아 있고, 패션을 창조하면서 예술·건축·영화의 원천이 되는 존재. 2024년 기준으로 1만5천 명이 넘는 직원과 54억3천만 유로(한화로 약 9조3천억원)의 매출, 그리고 약 8억3천9백만 유로의 순이익을 기록한 프라다를 하나의 정의 안에 가두는 것은 어렵다. 그러니 이 여정을 역사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출발점은 1900년 초 이탈리아. 당시 도시엔 부르주아 계급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들은 더 선진적인 유럽 국가들의 삶의 방식과 행동을 모방하고자 했다. 그 혁명의 중심은 밀라노였다. 1913년, 미우치아의 할아버지 마리오 프라다와 그의 형제 마르티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안에 첫 부티크를 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최고급 가죽 제품과 여행용 가방을 판매했고, 덕분에 1919년 이탈리아 왕실의 공식 공급 업체로 선정된다. 프라다는 파시즘 시대(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했던 약 20년, 1922~1943년) 동안 번영한 수많은 브랜드 중 하나다. 2차세계대전 후에는 마셜 플랜(전후 유럽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대규모 지원 정책)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정책으로 인해 가죽 제품과 고급 원단, 디자인, 장인정신, 그리고 수많은 응용 예술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산업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발전하여 나라 전체로 퍼져 나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1960~70년대 이후 펼쳐진 ‘메이드 인 이탈리아’ 럭셔리의 기적을 마련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 주역 중 하나가 바로 프라다다.

가족 기업의 상속인인 미우치아 프라다와 제품 제조에 면밀한 지식을 갖고 품질에 집착하는 기업가 파트리치오 베르텔리. 1978년, 업무적 만남에서 시작된 인연은 프라다 제국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1987년엔 결혼으로 삶의 동반자가 되었으니, 이야말로 운명적인 스토리가 아닐까. 미우치아와 베르텔리는 50여 년에 걸친 성공과 위기를 함께 겪었다. 가방과 신발(1979년), 여성복(1988년), 남성복(1993년), 미우미우(1993년), 그리고 럭셔리 브랜드 최초로 스니커즈를 선보인 리네아 로사 스포츠웨어(1997년)에 이어 향수, 뷰티, 주얼리, 심지어는 1894년 창립된 제과점 마르케지에 이르기까지 그 저변을 넓혔다. 페미니스트이자 패션에 독보적 감각을 지닌 미우치아는 컬렉션을 통해 한 시대의 미학을 정의해 왔다. 그녀의 비전은 늘 독창적이며, 그 안에는 미니멀리즘과 장식, 유니폼과 개성, 빈티지와 혁신이 공존한다.

프라다는 한 세대의 크리에이터들에게 사고와 취향의 학교를 만들어냈다. 프라다의 전 스타일 디렉터 마누엘라 파베시, 프라다의 전 디자인 디렉터 파비오 잠베르나르디와 같은 인재에게 표현의 플랫폼을 제공했으며, 알레산드로 미켈레와 조나단 앤더슨 같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한편 프라다는 홍콩 증시 상장(2011) 전, 10여 년간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후 전 세계 매장을 통한 브랜드 확장, 다른 패션 브랜드 인수(최근엔 베르사체), 밀라노 재단 설립(1993년)과 베네치아 지부 개관(2011년)을 통해 건축, 영화, 특히 현대미술에 대한 깊은 열정을 구체화했다. 오늘날 두 사람은 여전히 함께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프라다 제국을 차세대로 넘겨주기 위한 인계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2020년에는 라프 시몬스가 프라다의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했다. 2023년엔 베르텔리를 대신해 안드레아 구에라가 CEO로 취임했다. 미래에 회사를 이끌게 될 아들 로렌조는 커뮤니케이션 및 마케팅 디렉터이자 기업 사회적 책임을 맡았다.

프라다 주역들과 만나기 전 몇 주 동안, 전쟁과 폭격, 관세와 민족주의, 패션계에 일어나는 디자이너 교체 소식이 뉴스를 지배했다. 사실 이런 시기에 프라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조금 곤란할 수 있다. 왜냐면 이 그룹은 경제적·문화적 엘리트를 위한 제품을 생산하며, 럭셔리 산업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다만 미우치아는 ‘럭셔리’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한편으론 쉬울 수도 있다. 그동안 프라다는 현실과 마주하는 것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컬렉션 혹은 현대미술 전시를 통해서 말이다. 이 긴 대화 속에서 그 누구도 ‘노코멘트’로 시대적 문제를 피하지 않았다. 우리의 책임은 개인적 논평과 그룹 철학 사이를 구분하는 일이었다. 프라다는 매우 노출된 브랜드이지만, 동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적인 브랜드다. 가장 내밀한 의미에서 아직도 ‘가족’이고, 부모와 자식이 함께 일하고, 예술과 정치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한다. 이런 다양성과 소속감은 동종 업계의 기업과는 다른 점이다. 동시에 프라다는 세계적인 경제적 강자다. 그렇다면 이 다면적인 이미지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창의적이면서 동시에 산업적이고, 모순과 논쟁, 의견 충돌이 결정의 방식이 되는 현실 속에서. 바로 이것이 우리가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통해 탐구하려 했던 유일무이한 레시피의 ‘비밀 재료’다.


미우치아 프라다

미우치아(1949년생)는 늘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있다. 타고난 패션 감각은 삶과 관계, 예술과 영화 속에서 자란 것이다. 그녀에게 일은 절대적인 언어이며, 후대에 남기고자 하는 도덕적 유산이다.


라프 시몬스, 파트리치오 베르텔리, 그리고 로렌조를 정의해줄 수 있나요? 저는 정의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아요. 사람을 한 문장으로 규정하는 건 더더욱요. 무엇이든 절대적인 답은 없다고 믿어요. 그래서 구체적인 질문에는 거의 답하지 않아요. 대신 복잡한 건 답할 수 있죠.

프라다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요? 브랜드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나요? 처음엔 거의 끌려가다시피 시작했죠. 1970년대 당시 전 페미니스트였고 지식인들과 어울리곤 했어요. 패션에 대해 생각한다는 자체가 부끄러웠어요. 그럼에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베르텔리를 만났고,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았어요. 그저 길이 시작된 거죠.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두 사람의 첫 만남에 대한 소문이 무성해요. 누군가는 밀라노 박람회에서 당신이 베르텔리에게 “내 디자인 베끼지 마”라고 항의하러 갔을 때라더군요. 벌써 너무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네요. 어쨌든 우리는 곧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별다른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얽히게 되었어요.

그 과정은 본능에서 비롯된 건가요, 아니면 더 많은 책임이 개입된 건가요? 물론 고민했죠. 하지만 전 프라다를 만들기 위해 그저 책상 앞에 앉아 있지 않아요. 어떤 결정적인 선택을 했다는 자각도 없이, 어느 순간 함께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베르텔리와의 관계는 큰 충돌도 있지만, 깊은 유대감도 있다고 하죠. 늘 그래 왔듯 끊임없이 다퉈요. 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통하는 감각이 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더 깊어졌죠. 아마 우리가 수많은 경험을 함께했기 때문일 거예요. 공통 관심사도 아주 많아요.

브랜드와 삶을 분리하기 매우 어렵죠. 어떻게 하나요?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아요. 특히나 개인적인 이야기는 꺼리는 편이죠. 한 가지 분명한 건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거예요. 전 모든 것과 함께 살고 있어요.

거대 그룹을 이끄는 인물의 사생활이 비공개로 유지되는 경우도 드물죠. 제 아이들은 열두 살쯤 되어서야 엄마가 유명 디자이너라는 걸 알았어요. 전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만나고, 동시에 예술가나 건축가, 영화감독 등 유명인과의 인연도 있어요. 사적인 삶과 일이 공존하죠. 하지만 제 삶은 정말 평범해요. 특히나 우리 집이 노출되는 건 원치 않아요. 태어나고 자라온 밀라노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는 자체가 저를 현실에 단단히 붙들어 줍니다. 제겐 정말 소중한 요소죠. 전 늘 이렇게 말해요. “내가 진짜 관심 있는 건 사람들의 삶”이라고.

당신은 호기심 많은 사람인가요? 호기심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전 사람들의 삶이 모든 것을 말한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정치나 철학, 도덕, 열정 같은 것들 말이죠. 그리고 선과 악이요.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는 대부분 가족 기업으로 이루어져 있죠. 그러다 세계적인 그룹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프라다는 이 과정을 오랫동안 준비해 왔어요. 저와 남편은 ‘우리의 미래’를 긴 시간 준비했어요. 둘의 미래가 아닌 절대적 의미에서의 미래요. 죽음은 전혀 두렵지 않아요. 미래를 위해 회사를 체계적으로 조직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제가 있는 동안엔 괜찮지만 없다면, 다른 사람이 이어나갈 겁니다. 이건 아주 명확한 의지예요.

어려운가요? 물론이죠. 하지만 회사의 가치에 대해 수많은 관점과 개념적 기반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로렌조가 그 기반을 완벽히 따르면서 자신만의 것을 더하고 있어요. 전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일에 관여해요. 일 잘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거든요. 특히 사소한 부분일수록 중요하죠.

디테일 말인가요? 아니요. 일종의 업무 철학입니다. 제 스스로가 ‘가르치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제품에 대한 열정과 회사의 경제력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나요? 가끔 그 두 가지가 일치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우린 미소를 짓죠. 아무도 웃지 않는다면, 좋은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뜻이에요.

라프 시몬스와의 창작 과정, 즉 컬렉션은 어떻게 탄생합니까? 논리적인 결과물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주제를 선택했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죠? 연속? 반대? 혹은 변형? 중요한 건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이 가장 의미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이에요.

영감은 삶을 관찰하는 데서 오나요? 보고, 느끼고, 읽은 것에서 와요. 그리고 저는 늘 패션의 ‘감각’에 대해 생각해요. 그 감각이 있다면 좋지만 없다면… 다른 일을 하는 게 낫겠죠. 그건 본능이니까요.

당신의 본능이 프라다 DNA를 정의하는 일관된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죠. 패션에 대한 감각. 그건 옷뿐만 아니라 태도, 가치관의 방식에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제가 패션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웃음) 어릴 때부터 모두 긴 옷을 입을 때, 전 짧은 옷을 입고 싶어 했죠. 항상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가장 먼저 하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경쟁적인 방식이랄까요? 이것이 바로 저만의 색깔입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예요.

새로움이란 무엇인가요? 생각해본 적 없는 대상이나 주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만드는 것.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는 것.

방법이 있나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아주 많은 걸 생각해요. 솔직히 말해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설명하기 어렵네요.

그 개념적 구조는 어떻게 옷으로 옮겨지나요? 그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에요. 예를 들어 봅시다. 가볍고 경쾌한 컬렉션은 어떤 요소가 필요할까요? 큰 방향이 시작되면 그 다음엔 많은 것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쇼츠가 트렌드가 아니라면, 미니스커트가 더 낫겠죠. 그때 내가 말한 개념을 더해요.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의 패션 감각입니다. 가볍게 생각하는 것, 그 장난스러운 생각조차 패션의 일부가 돼요. 좋은 의미에서요.

당신의 컬렉션은 모순된 요소가 늘 함께합니다. 저도 온전히 이해하진 못해요. 완전히 본능이죠. 어쩌면 그 점이 스스로를 지치게 만든 것 같아요. 항상 전 어떤 것과 그 반대되는 것이 공존해야 해요. 제 안에 깊게 뿌리내린 성향이죠. 스타레트(starlette, 스타처럼 화려하고 여성적인 룩) 스타일에 남성 슈즈와 촌스러운 카디건을 곁들이는, 늘 이런 식이에요. 아마 다면성 혹은 복잡함을 말하기 위한 방식이 아닐까요. 이건 제 근본이자 프라다의 DNA이기도 해요. 빨강이 있다면 검정이, 예쁜 것이 있다면 추한 것도 있어야 하죠. 단순한 반항이 아닌, 무언가 깨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에요.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충돌할 때 결국 그 합이 이루어지나요? 그 부분이 정말 중요해요. 그걸 완벽히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왜죠? 이제는 그조차 살짝 지겨워졌거든요. 어쩌면 모든 것을 부드럽고, 예쁘고, 귀엽게 만들지도 몰라요. 저에겐 극도로 어렵겠지만, 오히려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죠. 모든 것이 완벽하고 나쁜 취향이 없는, 그것도 정말 놀랍네요.

‘놀랍다’란 표현은 당신을 정의하는 단어 중 하나예요. 마음에 드나요? ‘예상 밖의’, ‘예측 불가능한’. 물론 좋아요. 전 처음부터 나일론 소재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 악어 가죽과 나일론으로 만든 가방을 선보였어요. 이것이 제 머릿속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전 늘 기술과 미래를 사랑해요. 물론 과거도요. 모든 분야에서 과거는 절대적으로 중요하죠. 그래서 전 요즘 역사를 배우고, 책을 읽는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어요.

고대일까요? 아님 최근의 역사일까요? 대체로 18세기 이후니까 비교적 가까운 편이죠. 지금 세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예요.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하고, 시도해야 하고, 시험해야 하죠. 그것이 지적 갈증인지 호기심인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끊임없는 배움과 열린 태도가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히려 시대정신은 폐쇄와 장벽을 세우고 있어요. 이해하려면 더욱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지금은 그런 시기죠.

사회적 후퇴의 시기라고 보나요? 지금은 거대한 변화 속에 있어요. 인터넷과 SNS는 전기나 전화, 바퀴보다 더 강력한 혁명이죠. 서로 24시간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진정한 소통은 부재한, 모순적인 세상이에요. 젊은 사람들은 특히 복잡할 거예요. 우리에겐 이 강력한 도구들이 세상을 해치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어요.

당신은 도덕과 책임의 중요성을 자주 말합니다. 네. 제 세계관이에요.

지금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1960~70년대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하나요? 항상 어려웠고, 지금도 마찬가지죠. 다만 예전에는 친구나 정치적 모임 같은 작고 친밀한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지금은 전 세계가 무대라는 점에서 규모가 달라졌어요.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게 자연스러운 환경이죠.

각자가 가질 수 있는 개성이 훨씬 많아졌다고 보나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저에게 세상은 유럽과 북미가 전부였어요. 다른 곳도 있었지만, 너무 멀었죠. 지금은 모든 게 함께해요. 종교, 민족, 정치까지 모두 얽혀 있어서 이해하기도 어려워요. 중요한 건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교육이 정말 중요합니다. 직감적으로 내린 결정인데, 재단을 통해 어려운 전시를 하려고 해요. 쉽게 소비되는 전시 말고요. 모두 청소년에게 목소리를 주자고 말하지만, 아무도 실천하지 않아요. 전 재단이 진짜 교육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팀을 만들고 있어요. 가볍지 않고, 도덕을 강요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죠.

미학과 도덕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물론이죠. 옷의 근본은 도덕이에요. 의미 없는 물건이 아닌, 진짜 필요한 것을 만드는 것. ‘상업적’이란 건 모욕이 아닌 우리 일의 정직함이에요. 제가 디자인을 하면, 브랜드는 그걸 생산하고 판매해야 하죠. 팔릴 만한 것을 만드는 자체가 도덕적인 일이에요. 전 예술가가 아니니까요. 만약 재킷을 만든다면 그 속에 내 생각과 시각이 담겨 있어야 하죠. 사람들은 우리의 진심을 이해하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저와 남편은 올바르고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만듭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어요.

반대는 안 되나요? 오롯이 돈을 위한 건 절대 안 돼요. 지적 정직함이 가장 중요한 가치예요. 작은 요소까지도. 물건이 넘쳐나는 요즘, 사람들의 선택 기준은 그 안에 담긴 ‘생각’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프라다를 입는 거죠. 재단이 있어서, 또 유명인이 입어서가 아닙니다. 그 안에 진지한 작업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죠.

다시 패션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돌아가 봅시다. 요즘 전 두 가지 언어로 말해요. 패션과 재단. 제가 알고, 배우고, 생각하는, 지적 삶과 유희, 인간이 가진 모든 얼굴을 옷에 담아요. 이것 또한 여러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프라다 여성들은 여러 모습을 가졌어요. 여성에 대한 기준은 없습니다. 저마다 각자의 삶이 있고, 제 작업 중 스스로 닿는 조각을 가져가면 될 뿐이죠. 핵심은 옷을 입는 방식이 아니에요. 옷을 발판 삼아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향하고 있는가 하는 거죠.

런웨이와 일상, 어느 쪽에 더 자신을 동일시하나요? 그 누구에게도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전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고, 타인 역시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저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뿐입니다. 전 늘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동안엔 옷을 팔겠어”라고 말해왔죠. 지금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시스템은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느낀 바를 옷 속에 담아내면, 그 진정성이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 믿습니다.

‘럭셔리 산업’이란 표현을 싫어한다고요. 럭셔리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순간 뻔해져요. 솔직히 말하면 단어가 좀 천박한 느낌이에요. 차라리 아름다운, 지적인, 탐나는 이런 표현이 낫습니다. 굳이 하나를 고르면 ‘유용한(utile)’이요.

최근 몇 년간 프라다의 이미지에 영향을 준 컬렉션을 고른다면요? 노코멘트. 알고 싶지도 않고, 설령 안다 해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회고전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일까요? 다른 사람은 괜찮아요. 하지만 스스로 인생의 단 한 조각을 고를 수 있을까요? 그 안에는 아름답고 때론 추하고, 중요하고 덜 중요한 모든 것이 있어요.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의 이야기죠. 그중 몇 개만 골라내는 건 불가능해요.

특히 더 좋아하는 순간은 없나요? 아니요. 아니요. 그건 당신이나 평론가들이 말하면 돼요. 전 좋아하는 게 많아요. 하지만 말하기엔 좀 부끄러워요.

지금 당신은 어린 시절 꿈꿨던 모습과 일치하나요?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조차 없었죠. 그냥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왔어요. 아, 확실히 사랑은 꿈꿨네요.

사랑을 찾으셨나요? 제 기준은 항상 부모님이었어요. 두 분의 이야기는 너무 기적 같아서 그 어떤 사랑도 감히 비견될 수 없다고 느꼈죠. 그만큼 사랑에 대한 기대치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랑이란 서로를 위해 끊임없이 배워가는 과정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죠. 우리는 프라다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종의 ‘선전부’와 같은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생각합니다. 파시즘 시절 문화선전부(MinCulPop)는 젊은 층에게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세 가지 핵심 요소, 즉 패션(제복), 영화, 건축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현재 프라다 소통의 중심축이기도 하죠. 의도된 계획이었을까요? 영화는 저라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정치학 전공은 가장 쉬워서 선택했을 뿐이에요. 대학 졸업 후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영화와 문학이 저의 진짜 열정임을 깨닫았죠. 다만 문학에 대한 열정은 삶의 이야기를 하나의 원처럼 닫는 방식 때문에 10년 정도로 짧게 끝났습니다. 프라다는 패션뿐만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도 세상을 담아 왔습니다. 국적과 시대를 불문하고 이야기와 장소, 그리고 사람을 기록해 왔죠. 그동안 영화감독들과 협력하며 고민해온 결실로, 지난 5월 독립영화 기금을 마련했습니다. 이 기금이 현대의 창작과 실험의 토대가 되어 더 넓은 대화와 이어지길 바랍니다. 저 또한 직접 프로젝트를 분석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으려 합니다. 재단의 상영관이 활기차게 운영되는 모습을 보니 정말 뿌듯하고 기쁩니다.

좋아하는 영화를 볼 때 감정이 북받치나요? 아주 많이요.

옷을 좋아할 때보다 더요? 훨씬 더요. 옷을 입는 데 투자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어요. 휴가 때 옷에 전념할까 싶어 큰 여행 가방을 챙기지만, 결국 실천하지 못하죠. 패션은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 잘 작동해요. 문제나 비극, 병을 겪을 때는 패션을 원치 않죠. 패션은 행복한 시기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요즘 잘 지내고 있어요. 그래서 옷차림에 더 신경 쓰고 있죠.

그렇다면 건축은요? 애초에 매장은 제품을 돋보이게 하는 공간이고, 건축은 그 목적을 뒷받침하는 후속 작업이었죠. 본격적으로 건물을 지을 때가 되자, 저명한 건축가에게 의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건축가 렘 콜하스(Rem Koolhaas)와 함께했고, 훗날 그는 뉴욕, 로스앤젤레스, 도쿄의 매장을 ‘에피센터(Epicenter, 단순한 플래그십을 넘어 문화적 에너지가 발산되는 지점이란 의미)’라 명명했죠. 이는 전적으로 남편의 직관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습니다.

매장을 꾸밀 때 매우 과감한 선택을 한다고 알고 있어요. 그 부분은 남편과 함께 했어요. 옷을 돋보이기 위한 공간과 작업 도구가 필요했을 뿐, 건축에 관한 문제는 전혀 논의되지 않았죠. 맞아요. 어쩌면 아름다웠을 수도 있어요. 모두 훌륭한 소통의 도구들이었으니까요.

프라다의 역사로 돌아가 봅시다. 어려운 순간도 있었죠? 사람들은 종종 “문제가 있어요”라고 말하곤 했어요. 전 개의치 않았어요. 돈보다 인생이 더 우선이었거든요.

‘이번에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나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대부분 항상 일이 잘 풀렸으니까요. 홍콩 증시 상장 시기는 힘들었지만, 그 일로 흔들리지는 않았어요. 일로 인해 패닉에 빠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성공은 사람을 더 신중하게 만들까요? 규모가 커지면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되죠.

베르사체 인수를 어떻게 보시나요? 위험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어쨌든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요. 로렌조가 강력히 원했고, 함께 추진한 일이에요. 베르사체는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패션 시스템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적인 브랜드입니다. 슈퍼모델 중심의 화려한 패션쇼를 선보이고, 패션을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확장한 선구자였죠. 베르사체의 모든 작업은 경이로운 퀄리티를 자랑했으며, 누구보다 앞서 음악의 가치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여전히 패션은 부르주아적 고정관념에 젖어 있나요? 아니면 1900년대에 사라졌다고 생각하나요? 패션은 귀족에게서 시작되어 부르주아 계층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여전히 고정관념과 규정된 여성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죠. 오히려 이런 면에서는 퇴행의 시기라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면 패션 시스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프라다를 제외하고는 그리 건강한 시기는 아닌 것 같아요. 잘 모르겠네요. 전 우리가 할 일에만 집중해요. 하긴 기업이 너무 많긴 하죠. 6천 개의 브랜드가 있고, 또 매일 새로운 브랜드가 생기니까요. 그만큼의 천재 디자이너가 필요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요. 어쨌든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결합이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아요.

프라다는 예술가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죠. 특히 당신은 수집보다 예술가와의 대화에 더 관심이 많아 보여요. 훨씬요. 저는 ‘컬렉터’라는 단어를 싫어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작품을 구입해요. 예술가와 교감하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소유하고 싶죠. 이것이 꼭 고상한 이유는 아닐지라도, 인간적인 이유입니다.

구입한 모든 작품마다 예술가와 관계를 맺어 오셨나요? 당연하죠. 저와 베르텔리는 삶과 사상이 중요했기에 프라다 재단을 설립했습니다. 궁금한 예술가가 생기면, 함께 일해 보자고 요청합니다. 그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죠.

반면 재단 활동과 패션 활동은 항상 구분해 왔습니다. 재단 설립도 베르텔리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이 공간은 조각 전시장으로 딱이네요”란 조각가 친구의 말이 계기가 되었어요. 제가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요”라고 하자, 베르텔리가 “해보자”라고 했죠. 그렇게 예술가들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존중하고 있고, 우리의 의도가 진지하다는 걸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때 완벽한 분리가 시작되었죠. 하지만 4년 전, 상황을 바꿔 프라다를 이용해 문화를 확산시킬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로렌조 역시 관심 있는 일입니다.

미우미우 고객들은 예술, 음악, 그리고 패션 퍼포먼스를 서로 별개의 장르로 구분 짓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문화적 경험으로 다가옵니다. 솔직히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예술은 패션보다 더 진지합니다. 예술은 사고와 인간 존재를 자유롭게 탐구할 자유가 있지만, 패션은 팔아야 하는 비즈니스죠.

예술가들에게도 체계가 있어요. 물론이에요. 하지만 원칙적으로 예술은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패션이 아무리 창의적이고 진지해도 예술과는 다르죠. 패션 기업의 목적은 옷을 파는 거잖아요. 전 한 번도 제가 예술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창의적이고 지적이지만, 다르죠.

지금도 일을 하고 있죠? 네. 좋고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면서요.

미래에 대한 생각은 삶에 필수적인 사고입니다. 당신이 그 미래의 일부이든 아니든, 우리는 미래를 상상해야 합니다.


라프 시몬스

붐! 모든 게 바뀐다. 프라다의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라프 시몬스(1968년생)는 프라다 여사에게서 자신과 같은 독립적인 정신을 발견했다. 그는 패션계에 더 많은 용기와 젊은 크리에이터에 대한 더 많은 투자, 그리고 대중에 대한 더 큰 존중을 요구한다.


미우치아 프라다와 인터뷰를 앞두고 있어요. 조언을 한다면요? 잘 모르겠어요.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요. 미우치아는 대답 방식에서도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에요. “함께 어떻게 일하나요?” 같은 안전한 질문보다, 영역을 벗어난 질문을 던지는 것이 흥미롭다고 봅니다. 사실 우리는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아요. 더군다나 지금처럼 따로따로 인터뷰하는 일은 전혀 없었죠.

프라다 가족을 처음 만난 시점은 언제입니까? 브랜드 라프 시몬스를 론칭했던 1995년입니다. 당시 프라다는 일부 벨기에 디자이너와 헬무트 랭, 질 샌더와 더불어 제가 현대적이라고 느꼈던 브랜드 중 하나였어요. 전 2001년에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2006년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 응용미술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패션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베르텔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시 그들은 질 샌더를 인수한 상태였고, 제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직을 제안했습니다. 무척 설레었습니다. 첫 면접은 단둘이 진행했고, 미우치아는 잠시 얼굴만 비췄을 뿐이었죠.

미우치아는 당신의 디자인 방식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나요? 아니면 매장에 진열된 컬렉션만 본 상태였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질 샌더는 매우 진지하고 미니멀한, 절제된 브랜드였습니다. 반면 저는 벨기에 출신의 아방가르드한, 고스, 펑크, 다크, 로맨틱 등 그와는 정반대에 가까웠죠. 그래서 그들이 저를 믿어주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질 샌더와 헬무트 랭을 모두 매각해야만 했어요. 떠올려 보면 당시는 독립 디자이너들에게 매우 가혹한 시기였습니다. 저나 마리오 소르보(Mario Sorbo), 일라리오 모리(Ilario Mori) 등 처음에는 모두 큰 호응을 얻었지만, 곧 업계 구조가 변했거든요. 편집숍 바이어들이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그들은 판매가 좀 덜 되더라도 쇼윈도를 멋지게 장식해줄 헬무트 랭 같은 독립 브랜드를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프라다 그룹이 헬무트 랭과 질 샌더 같은 브랜드를 인수하면서, 저희 같은 작은 독립 디자이너의 입지는 더 좁아졌어요. 바이어들이 대기업 소속 브랜드의 컬렉션을 더 많이 구입하기 시작했거든요. 2006~2007년경 시장 구조가 변했고, 그들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질 샌더 매각 후에도 프라다와의 관계는 이어졌습니다. 도쿄에서 열린 미우미우 쇼에서 그들을 만난 기억이 나네요. 제가 디올과 캘빈 클라인을 거친 뒤 베르텔리가 다시 연락을 해왔습니다. 간결한 편지를 보냈죠. “밀라노에 올 의향이 있습니까?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만남이 성사되었군요. 오후 내내 대화와 아이디어가 오갔죠. 미우치아는 조만간 은퇴 생각이 전혀 없었고, 저 역시 혼자 이끌어가는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죠. 그때부터 미우치아도 대화의 핵심 축이 되었어요. 모든 게 정말 멋지다고 느껴졌고, 순식간에 계약이 성사되었어요. 질 샌더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프라다에서는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일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지금까지 쌓아온 서로에 대한 신뢰가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프라다 그룹은 그동안 당신이 일해온 곳과는 다른가요? 많이 다릅니다. 정말 이례적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이곳은 그 무엇도 관습적인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저를 놀라게 하는 것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죠. 우선 이곳은(지금의 프라다) 창립자들이 건재한 그룹입니다. CEO인 안드레아 구에라부터 로렌조 베르텔리, 마케팅팀, 재무 책임자 등 매우 친밀하게 소통하지만, 다른 곳과는 전개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모두 한 방에 다 같이 모이는 일은 드물죠. 정말 독특한 레시피 같고, 미국식 기업 문화와는 아주 다른 조직입니다. 개인적으로 미국보다 유럽이나 아시아의 비즈니스 방식에 더 친숙함을 느낍니다. 뉴욕에 처음 갔을 때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곧 냉정한 현실을 마주한 기분이었죠. 겉으로는 예의 바르고 호의적이었지만, 뒤에서는 상황이 아주 달랐거든요. 반면 이곳은 모든 것이 매우 직접적이고 솔직합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항상 알 수 있죠. 뒤통수를 맞는 일 따위는 불가능한 곳입니다.

왜 2022년에 브랜드 라프 시몬스를 종료하기로 결정했나요? 저는 ‘종료’보다는 ‘중단’이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우선 개인적인 삶의 이유 때문이었죠. 두 개의 브랜드를 운영하는 건 늘 정신없이 바쁜 일이었습니다. 한 가지 일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다른 일로 들어가는 식이었고, 양쪽 모두를 생각해야만 했으니까요. 제 브랜드는 작지만 신뢰할 수 있는 팀이 있습니다. CEO 비앙카 퀘츠 루지(Bianca Quets Luzi)와 한동안 고민을 이어갔어요. 당시 런던 쇼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로 다른 이들처럼 일정을 재조정해야 했습니다. 그때 문득 생각했습니다. ‘클럽에서 쇼를 열자. 좌석도 없애고, 오는 사람 누구든 환영하는 거야. 학생들에게도 문을 열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자.’ 그리고 그렇게 실행했습니다. 완벽했죠. 그 순간 저는 지금이 멈춰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힘들었던 점은 함께 일해 온 사람들을 챙기는 일이었어요. 그중 세 명은 여전히 함께하며 많은 일을 맡고 있습니다. 축구장 크기만 한 아카이브를 정리하는 작업도 남았고요. 제 안의 일부는 아직 끝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브랜드는 여전히 제 소유이고, 제 이름을 걸고 있죠. 당장 내일이라도 다시 열고 싶다면 저에게 그럴 권한이 있어요.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죠.

당신과 프라다의 DNA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음악, 건축, 디자인, 테일러링, 스타일링, 서로 다른 요소의 조합까지 말이죠. 일반적으로 패션이 파격적일 때조차 그 안에는 일종의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공포는 창의성의 가장 큰 적이죠. 공포를 느끼면 사람들은 덜 자유로워지고, 각자 자기방어적인 태세를 취하게 됩니다.

상황이 바뀌려면 시간이 걸릴까요? 확실히 지금은 불확실한 시기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거대 기업들이 너무 멀리 가버려 마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습니다. 이제 권력은 더 이상 디자이너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많은 브랜드가 창립자의 창의적인 역량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버렸죠. 수년간 매출을 극대화하는 경제적 메커니즘이 구축되었지만,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결과는 슬플 뿐입니다. 저는 독립적인 젊은 디자이너들을 보호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와 비즈니스가 항상 손을 맞잡고 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디올에 갔던 건 호기심 때문이었어요. 거대 브랜드를 이끄는 것이 제 기준에서는 매우 아방가르드한 일이라고 생각되었거든요. 도전이자 언더그라운드적인, 그래서 예상치 못한 일처럼 느껴졌죠. 디올의 스태프들과 일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수많은 대화와 끈끈한 결속력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떠나야 할 때임을 느꼈습니다. 캘빈 클라인은 저의 아메리칸 드림이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곳을 떠날 때 저는 생각했죠. ‘이제 충분해. 더 이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앤트워프에서 조용히 지내며 내가 관심 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싶어.’ 그때 베르텔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프라다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지만, 동시에 제가 ‘yes’라고 답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브랜드 중 하나였습니다. 무엇보다 문화와 사고방식 때문이었고, 변화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미우치아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과거가 더 좋았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책임과 회사 경영, 인력 관리에 대한 부담이 적어 훨씬 수월합니다. 결국 패션은 속도를 따라가는 것 외에도 매우 실용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패션 시스템을 초기화하고,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만약 누군가 방법을 안다면, 시도할 법도 하죠. 하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모를 겁니다. 1970~90년대에는 독립 디자이너가 세상에 알려지기가 훨씬 쉬웠습니다. 모든 세대는 누군가가 나서서 변화를 만들어 주길 기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벨기에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디자이너인 드리스 반 노튼은 “저 친구들을 가서 보세요, 정말 잘하거든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경쟁자를 홍보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생각은 이랬죠. ‘더 많은 젊은이가 자리 잡을수록 나와 내 환경, 그리고 우리 세대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패션을 강화하는 길이다.’ 이런 태도가 지금은 사라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상황이 정말 바뀔 수 있다고 믿거든요. 어쩌면 그 변화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요? 만약 모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내일 당장 퇴사하겠다”고 말한다면, 쾅! 하고 터지는 거죠. 그리고는 다음 날 모두 독립 디자이너로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시작할 정도의 돈은 다들 조금씩 모아두지 않았겠어요?

미우치아는 모험을 즐기는 편인가요? 그런 식으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베르사체 인수는 위험 요소일까요? 지금처럼 시장이 어려운 시기에는 그 무엇도 위험이 될 수 있죠. 하지만 동시에 올바른 전략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언급하기엔 이 문제는 조금 조심스럽네요. 저는 프라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때때로 저는 현실의 틀을 깨뜨려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좌석 없는 쇼는 안 돼, 사람들을 계속 서 있게 할 수는 없어’ 같은 관습 말이죠. 왜 안 되나요? 우리는 모두 좀 더 대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해봅시다. 당신과 미우치아 모두 컬렉터이고, 예술가들과 개인 친분이 있죠. 이것이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단순히 작품을 수집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종의 ‘몰입’이죠. 예술은 미우치아가 호흡하는 공기의 일부와 같습니다. 비록 그녀는 업무와 예술가들과의 관계를 분리하는 것을 선호하지만요. 저에게 예술은 일상의 근간입니다. 예술 없는 하루는 상상할 수 없죠. 제가 어렸을 때 벨기에에는 전설적인 큐레이터 얀 후트(Jan Hoet)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그는 겐트에서 유럽과 미국 예술가 50명을 초대해 일반 가정집에 작품을 설치하는 ‘샹브르 다미(Chambres d’Amis)’라는 전시 시리즈를 기획했죠.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15살이었고, 인터넷도 없고 레코드 숍 하나와 TV가 전부인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부티크조차 없었죠. 그런 경험들이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후 저는 가구 디자인을 전공했습니다. 발터 반 베이렌동크(Walter Van Beirendonck) 밑에서 인턴십을 하며 안트베르펜과 파리에서 아방가르드한 젊은 크리에이터들을 접했죠. 당시에는 옷이 아니라 그를 위해 가구, 액세서리, 가면, 거울 등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패션에 매료되어 안트베르펜 왕립 예술 아카데미 패션 학과장이었던 린다 로파(Linda Loppa)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제가 관심 있던 예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었죠. 세대 차이는 있었지만 우리 셋의 연결 고리는 매우 끈끈해졌고, 그들은 저를 무척 챙겨 주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가구를 디자인하고 싶지 않고 그녀의 학교에 입학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네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봐”라며 저를 몰아붙였죠. 정말 미칠 노릇이었습니다. 물건이나 자동차만 다뤄봤지 인체를 그릴 줄 몰랐거든요. 그래서 재봉 학교를 졸업한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40여 벌의 옷을 제작해 린다에게 가져서 “이제 학교에 넣어달라”고 했죠. 하지만 그녀는 거절했습니다. 대신 저를 헬무트 랭 등을 유통하던 밀라노의 다니엘레 기셀레(Daniele Ghiselli)에게 보냈죠. 낡은 차에 친구 한 명과 옷 40벌, 마르고 왜소한 체격의 다크한 소년들을 찍은 사진과 영상을 싣고 떠났습니다. 기셀레는 제게 “사진이나 영상은 필요 없으니 옷이나 걸어라”라고 하더군요. 저는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며칠 뒤 그에게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너의 옷을 일본 매장 9곳에 팔았다”고요. 저는 “이제 어쩌죠?”라고 물었죠. 그는 “생산해야지”라고 답했습니다. 전 너무 순진했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 사이 소문이 퍼졌고 벨기에 독점 판매 제안까지 받았습니다. 그때 린다가 제게 말하더군요. “이게 내가 너를 학교에 받아주지 않은 이유야. 학교에 오는 건 시간 낭비였을 거야. 넌 네가 뭘하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고, 준비가 됐거든.”

어떤 면에서는 지금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가나나 멕시코 젊은이들이 똑같은 희망을 품고 있죠. 네. 하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은 아마 훨씬 더 영리하고 아는 게 많을 겁니다. 저는 정말 순진했거든요. 옷을 보여주기 위해 안트베르펜의 하위 문화 속에 있던 친구들과 함께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죠. 첫 영상에는 소닉 유스(Sonic Youth)의 음악을 썼습니다. 그러다 섬유 산업계에서 일하던 어느 갤러리 관장의 남편을 만났고, 그가 1년 동안 저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매우 정직하고 직설적이며, 단순한 관계였고 모두가 진심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데만 관심이 있었죠. 수십억 달러의 수익 같은 기대치도 없었습니다. 네 시즌 동안은 오직 프레젠테이션만 했습니다. 파리에 가고 싶었거든요. 패션쇼는 나중에야 시작했습니다. 미리 제작해야 하는 영상보다 쇼를 여는 게 더 간편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죠. 어느 날 홍보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는데, 전 저에게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어요. 첫 번째 패션쇼 때는 누군가 담배를 피우다 의자에 불을 붙기도 했죠. 그런 시대였습니다.

미우치아와의 창작 과정으로 돌아가 봅시다. 남성복과 여성복을 디자인을 할 때, 대화의 양상이 달라지나요? 그렇지 않아요. 브랜드를 존중하기 위해 제 자신을 조금 더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결코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에요.

두 분 모두 남성성과 여성성이란 패션계의 상투적인 틀을 거스르고 계시죠. 슈퍼모델도, 마초적인 남성(alpha male)도 내세우지 않으면서요. 저는 미우치아와 달리 부르주아 출신이 아닙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태생에 대해 반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과정에서 그런 레퍼런스를 떠올리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울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식, 그리고 패션을 하는 사람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사소한 디테일이나 컬러 같은 것들을 관찰하는 방식은 저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이 모든 것이 제 안에 잠들어 있던 중요한 감수성을 깨워주었습니다.

미우치아는 ‘새로움’이라는 관념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당신에게 새로움이란 무엇인가요? 미우치아에게 새로움이란 과거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시도를 하는 것에 가깝죠. 다른 이들의 컬렉션을 보며 좌절감에 빠져 “내가 8년 전에 이미 했던 거야”라고 말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패션의 본질은 정확한 때에 정확한 장소에 있는 것이니까요. 앞서 언급했던 ‘공포’라는 감정으로 돌아가 보면, 새로움이란 대담해질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예상치 못한 영역을 탐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제 작업은 기성 세대에 대한 완벽한 반항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른 브랜드나 경쟁사 혹은 각 시장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살피며 디자인하는 경우가 많죠. 저는 정답을 쥐고 있지도 않고, 다른 이들처럼 확신에 차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대중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대중은 똑똑합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패션에 대해 언제나 관심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죠.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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