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푸르고 푸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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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시인의 얼굴] 푸르고 푸른

독서신문 2026-03-04 07:38:26 신고

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플라스틱 슬리퍼 한 짝이 맨드라미 옆에서 말라갔다.

어른들은 아홉 살 사내애를 건져 놓고 담배를 피웠다. 비가 많은 해였다.

사람 잡아먹는 산이라 했다. 양쪽으로 비스듬히 빠진 두 골이 만나는 자리. 가뭄에도 물을 강에 안겼다. 강은 곳곳에 소용돌이와 모래 구덩이를 감추었다. 저녁 물 소리마다 우렁이 굵었다.

고요해진 물 위에 나는 벗은 몸을 비춰 보았다.

사나 여럿 후릴 상이라 했다.

몸이 분 강물 위로 물고기들이 튀어 올랐다.

비가 많은 해다. 아버지가 사라졌다. 무당은 자꾸 물이 보인다 했다. 아버지는 산에서 발견됐다고요. 바위를 덮은 이끼가 젖었다.

강물과 산이 푸른 웃음을 주고받는다. 만삭의 배를 감싸며 나도 씨익, 웃어 주었다.

이슬이 비쳤다. 삼우제였다. 아기는 뱃속에서 육십 년쯤 살고 나온 얼굴이다.

靑碧山 푸르다.

고요한 수면 아래

흰 발목을 잡아채는 푸른 손아귀가 있다

-허은실, 「청벽산은 푸르다」

 

푸르고 푸른

봄이 완연합니다. 그런데 무언지 아쉽습니다. 이를 두고 이수복은 시 「봄비」에서 “이 비 그치면/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노래했지요. 봄 싹 움트는 계절에 죽음을 떠올리는 심사는 무얼까요. ‘4월은 잔인한 달’이라 말했던 엘리엇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네요. 이 ‘서러운’ 아우라를 간직한 시인이 몇 있지요. 특히 여성 시인 중에 말입니다. 황진이가 그랬고, 허수경도 그랬고, 이제 그 흐름이 허은실에게도 얼비치었습니다. 황진이의 마음은 다 풀지 못한 봄기운 끝자락이라 할까요. 허수경은 자꾸 기울어지는 몸과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고 가버렸네요. 아직 허은실은 어디선가 푸른 꿈을 키우고 있을 테고요.

「청벽산은 푸르다」는 시 제목이 너무 예스러워 눈길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AI 시대에 이렇게 궁벽진 마음 좇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따르고 있습니다. 허은실의 시는 그런 맛이 있지요. 시에는 산도 강도 사람 목숨 잡는 장소로 비치네요. 이 근원적 공포는 불행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입니다. 무엇을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어떻게 시인은 받아내고 있나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함으로써 비로소 해소하고 있습니다. 강도 산도 사실은 죽음 끝에 삶을 저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네요.

‘청벽산’은 어디에 있을까요. 충남 공주 어디쯤 있을 것 같지만 왠지 마음속에 그리고 그린 서러움 속에 자리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황진이의 빼어남은 변치 않는 순정과 자기 주도적 사랑과 예술적 자유에 있다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애절한 그리움’에 있지 않을까요. 허수경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도 그가 남긴 설움의 빛이 아직 푸른 까닭도 그렇습니다. 허은실은 이를 어찌 알고 시에 담는지 흐뭇합니다. 청(靑)도 푸르고, 벽(碧)도 푸르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푸르고 푸른 삶을 서럽게 알뜰히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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