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전기차 시장에 유례없는 가격 인하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2000만원대 보급형부터 1억원대 플래그십까지 차급을 가리지 않는 전방위적 가격 조정이다.
단순 재고 소진 차원을 넘어 배터리 원가 하락과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체제로의 산업 구조 전환이 맞물린 전략적 선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브랜드 가리지 않는 공격적 가격 조정
지난 26일 업계에 따르면 이 같은 가격 인하는 2026년 1월 전기차 판매가 전월 대비 43.9% 급감한 배경에서 이뤄지고 있다. 누적 등록 대수가 89만9000대를 넘어서 보급 확대 단계에 진입했지만, 고금리와 보조금 축소로 수요 둔화가 뚜렷한 상황이다.
가장 공격적인 행보를 보인 곳은 테슬라다. 지난 1월 모델 3와 모델 Y 가격을 최대 940만원 인하하며 보조금 적용 시 실구매가를 3000만원대로 낮췄다. 여기에 볼보자동차코리아는 EX30 시리즈 가격을 최대 761만원 내리며 실구매가를 3600만원대까지 끌어내렸다.
현대차그룹도 가세했다. EV5와 EV6 가격을 각각 280만원, 300만원 인하했고, EV3와 EV4는 할부 금리를 1% 안팎으로 낮춰 이자 부담만 260만원 절감하는 효과를 냈다. 또한 기아는 EV9 연식변경 모델에 6197만원짜리 엔트리 트림 ‘스탠다드 라이트’를 추가하며 최상위 GT 라인 대비 1720만원 저렴한 선택지를 제시했다.
고가 세그먼트도 예외는 아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EQE SUV 후륜구동 엔트리 모델을 1억600만원에 출시하며 기존 사륜 모델 대비 3000만원가량 가격을 낮췄다.
이와 함께 2분기 출시를 앞둔 폴스타 3는 함종성 대표가 “전 세계 시장 중 한국에서 가장 매력적인 가격을 선보일 것”이라고 공언하며 1억원대 초반 가격을 예고했다.
배터리 원가 87% 급락과 LFP 확산
업계는 전기차 가격 인하 여력이 커진 배경으로 배터리 단가 하락을 지목한다. 블룸버그 뉴 에너지 파이낸스(BNEF) 자료에 따르면 리튬이온 배터리팩 평균 가격은 2013년 1kWh당 827달러 수준에서 2025년 108달러까지 하락했다. 10여년 사이 약 87% 급락한 것이다.
여기에 완성차 업체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채택을 확대하면서 원가 절감 폭이 더 커졌다. 에너지 밀도는 다소 낮지만 가격 경쟁력이 뛰어난 LFP 배터리를 보급형 모델 중심으로 적용하면서 전체 차량 원가를 낮출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됐다.
다만 충전 인프라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2025년 말 기준 누적 충전기는 46만9045기에 달하지만 완속 충전기가 41만6185대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해 충전기 1기당 전기차 비율은 오히려 악화되는 추세다.
데이터 확보 우선…플랫폼 선점 경쟁 시작
한편 전기차 시장의 가격 인하 경쟁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배터리 원가 하락 추세가 이어지고 SDV 체제 전환이 가속화되는 만큼, 완성차 업체들의 플랫폼 선점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기회지만, 완성차 업체들에게는 수익성과 점유율 사이 선택을 강요받는 시장 재편기가 시작된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의 가격 경쟁은 단순 판매 확대를 넘어선 상황”이라며 “향후 소프트웨어 주도권을 쥐기 위한 플랫폼 선점 경쟁”이라고 강조했다.
Copyright ⓒ 파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