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그림자, 까마귀라는 오해는 그만. 블랙이야말로 옷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컬러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랙으로 무장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트렌드를 따르기보다 자신만의 개성을 한 눈에 각인시킨다는 것. 블랙은 색을 덜어내는 대신 선과 구조, 텍스처에 집중합니다. 화려한 색감이 넘실대는 흐름 속에서 패션계가 여전히 블랙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디올의 2026 S/S 오트 꾸튀르는 하우스의 역사적 DNA를 자연과 공예, 장인의 손길이라는 키워드로 재해석한 시즌이었습니다. 꽃과 정원, 역사적 레퍼런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번 쇼는 풍부한 색채와 장식이 돋보였는데요. 그 속에서도 블랙이 존재감 있게 다뤄졌습니다. 컬렉션 후반부에 등장한 블랙 드레스와 어시메트릭한 드레이핑, 간결한 실루엣의 블랙 이브닝웨어는 컬러의 향연 속에서 시선을 머물게 했죠.
조나단 앤더슨이 표현한 블랙은 형태와 드레이프, 비율에 따라 다채로운 실루엣으로 전개됩니다. 유려하게 떨어지는 드레이핑은 자칫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는 블랙의 단조로움을 깨고, 입체적인 볼륨과 우아한 실루엣을 만들어냅니다. 이날 쇼에 참석한 리한나도 역시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단색의 룩에 풍성한 블랙 스카프를 매치해 포인트를 더했습니다.
마티유 블라지가 선보인 첫 샤넬 오트 꾸튀르에서도 블랙은 단연 존재감을 발했습니다. 사랑의 동산을 연상시키는 분홍빛 쇼장 한가운데서도, 블랙은 결코 묻히지 않습니다. 워킹에 따라 가볍게 찰랑이는 블랙 실크 모슬린 스커트는 헴라인에 깃털 장식을 더해 균형을 잡아주었죠. 이날 쇼장을 찾은 니콜 키드먼은 새의 깃털을 연상시키는 텍스처의 올 블랙 룩으로 등장해, 블랙 특유의 절제된 우아함을 극대화했는데요. 컬러를 최소화한 대신 소재와 구조적인 실루엣으로 승부한 스타일링이었습니다.
릭 오웬스와 블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블랙을 ‘타인에 대한 존중’이라 말해왔습니다. 자신을 과시하기보다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의 색이라는 의미인데요. “극적이지만 겸손하다”는 그의 표현처럼 블랙은 드라마틱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도 룩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죠.
릭 오웬스는 매 시즌 올블랙 룩을 중심으로 한 컬렉션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블랙을 반복하면서도 매번 너무나 다른 장면으로 등장한다는 것이죠. 색은 동일하지만 실루엣과 구조, 소재의 밀도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흐르듯 몸을 감싸는 드레이프부터 건축적인 실루엣, 날카로운 테일러링과 광택감을 더한 텍스처까지. 블랙은 그의 손에서 하나의 물감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캔버스가 되죠.
요지 야마모토 또한 블랙을 사랑하는 디자이너 중 하나입니다. 그는 블랙을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색”, “강요하지 않는 색”이라고 말해왔는데요. 그의 말처럼 그가 표현한 블랙은 조용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죠. 2026년 요지 야마모토 컬렉션은 전통적인 올블랙 룩을 기반으로 시작해 레터링 프린트와 프린지 디테일을 더해 다양한 블랙 실루엣을 구현했습니다. 겹겹이 쌓인 드레이핑과 비대청적인 실루엣은 형태와 움직임, 소재에 더욱 집중하게 만듭니다. 같은 색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이 차이야말로, 지금 패션 신에서 올블랙이 다시 중요해진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