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압박에 뾰족 수 없는 법원…법관들 "참담" 무력감 토로
이달 12∼13일 간담회 형식 법원장회의…후속대책 논의할 듯
(서울=연합뉴스) 이미령 기자 = 더불어민주당이 사법부 안팎의 우려에도 이른바 '사법개혁 3법' 입법을 강행하고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법원행정처장이 전격 사퇴하면서 법원 내부는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삼각 파도'가 덮친 가운데 법관들 사이에서는 '사법부 독립' 침해에 대한 우려 속에 "사법부에 대한 존중이 없다"며 참담함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국회는 전날 본회의에서 민주당 주도로 대법관 증원법(법원조직법 개정안)을 가결해 사법개혁 3법(법왜곡죄·재판소원·대법관 증원) 입법을 마무리 지었다.
국회 과반을 점한 민주당은 지난달 25일 법왜곡죄법(형법 개정안) 본회의 상정을 시작으로 사법개혁 3법 상정 처리에 돌입했다. 사법부는 여러 부작용 우려를 들어 이들 법안에 반대 입장을 밝혀왔다.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로 저지에 나섰지만, 의석 수 절대 부족과 극심한 내홍 속 야당의 한계를 드러내며 힘을 쓰지 못했다.
결국 민주당이 법안 처리를 강행하자 박영재 법원행정처장은 25일 각급 법원장들을 긴급히 소집해 전국법원장회의 임시회의를 열었다. 법원장들은 회의 끝에 "사법부의 우려에도 공론화와 숙의 없이 본회의에 법안이 부의된 상황에 심각한 유감을 표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사법부가 입법 사안을 두고 '유감'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결국 이튿날인 26일 법왜곡죄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27일 재판소원법 통과마저 기정사실이 되자 박 처장은 당일 오전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행정처장직 사퇴 의사를 전달했다.
박 처장은 그 직후 "사법부가 많은 어려움을 겪는 시점에 물러나게 돼 송구스럽다"며 "부디 현재 진행되는 사법제도 개편 관련 논의가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이뤄지길 간절히 바란다"고 사퇴의 변을 밝혔다. 이는 취임 42일 만으로 역대 법원행정처장 중 가장 짧은 재임 기간으로 기록됐다.
박 처장은 지난해 5월 파기환송 판결이 내려진 이재명 당시 대통령 후보의 공직선거법 상고심 때 전원합의체 회부 전 사건 주심을 맡아 처장직 임명 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민주당 강성 위원들로부터 사실상 사퇴 압박을 받아왔다.
민주당의 '사법개혁' 드라이브 와중에 국회와 소통 창구 역할을 하는 행정처장이 오히려 국회에서 사법부를 겨냥한 공세의 한복판에 서고, 결국 법안 통과도 강행되자 책임지는 차원에서 자진 사퇴를 결정했다는 게 법원 안팎의 시각이다.
중도 성향의 박 처장은 실력을 인정받아 법원 내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으면서도, 소탈하고 두루 원만한 스타일로 내부의 신망이 두터웠지만, 결국 사법부에 몰아닥친 파고를 넘지 못했다.
사법부 내에선 여권의 일방통행식 '개혁 드라이브'에 마땅한 대응 수단이 없는 현실에 무력감도 감지된다.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어찌 됐든 법안이 다 통과돼서 답답하고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은 들지만 어떻게 이야기해야 전달이라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며 "참담한데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다른 부장판사는 "행정처장이 사퇴까지 했는데 (국회에) 영향을 미치기는커녕 '대법원장도 사퇴하라'는 식의 반응이 나오는 것을 보니 사법부에 대한 존중이 너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처장이 갑자기 법원행정처장직을 내려놓으면서 조희대 대법원장은 당장 새 처장을 선임해 전열을 재정비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사법개혁 3법 입법에 따른 급작스러운 사법부 구조 및 제도 개편이 현실화한 만큼 새 처장은 입법부와의 적극적인 소통 아래 그 부작용을 최소화할 대책을 마련하는 데 몰두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박 처장(사법연수원 22기) 후임은 행정처 경험이 있는 대법관이 우선 검토될 전망이다. 그는 인사3담당관, 인사1담당관, 기획총괄심의관, 기획조정실장을 거쳐 차장을 지낸 바 있다.
연수원을 최상위 성적으로 수료한 대표적 엘리트 판사였지만 대외 소통능력과 정책적 감각 등이 필요한 행정처 근무 경험은 없는 조희대 대법원장을 보좌할 처장에게는 행정처 경력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많다. 이전 천대엽(21기) 처장의 경우 행정처 경력은 없지만, 센스가 뛰어나고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두 차례, 6년 넘게 근무해 사법부 사상 가장 오래 근무한 재판연구관의 한명이었다는 특징이 있다.
행정처 근무 이력 대법관은 오석준(19기)·서경환(21기)·권영준(25기)·이숙연(26기)·마용주(23기) 대법관(임명 시기 순)이 있다. 오 대법관은 공보관을 두 번 역임했고, 서 대법관은 송무심의관으로 일했다. 권 대법관의 경우 국제심의관실 판사로 있다가 서울대 교수로 옮겨 오래 지낸 뒤 대법관이 돼 돌아온 케이스다. 공대를 졸업하고 법대를 나온 이 대법관은 정보화심의관을 지낸 '인공지능(AI)·정보기술(IT) 전문가'다. 마 대법관은 행정처 인사관리심의관을 거쳐 윤리감사관을 지냈고 대법원 재판연구관·선임재판연구관·수석재판연구관도 거쳐 사법행정과 재판 업무 모두에 정통하다.
새 처장이 임명되기 전까지는 기우종 행정처 차장이 대행을 맡아 대외 업무를 수행할 예정이다.
오는 12∼13일 간담회 형식으로 열리는 전국법원장회의 정기회의에서도 사법개혁 3법 입법과 법원행정처장 사퇴 후속 대책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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