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하수민 작가] 어떤 작가에게 있어 자화상이란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형성된 자기 정체성을 기록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낸 골딘(Nan Goldin)의 작업은 이러한 자화상의 면모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낸 골딘은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체, 연인과 친구들, 사랑과 폭력, 중독과 상실이 뒤섞인 삶의 장면들을 적나라하게 카메라로 기록했다. 겉보기에는 개인적인 일기장 혹은 사적인 기록처럼 보이는 이 사진들은, 작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관계를 통해 자아를 드러내는 하나의 확장된 자화상으로 보인다. 골딘에게 있어 자화상이란 자신이 어떤 삶 속에 던저져 있는 지를 드러내는 창구라 볼 수 있다.
그의 대표작 ‘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 작품집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위 연작에서는 성소수자, 마약, 도시의 하위 문화, 그리고 작가의 개인적인 가족사와 연애 생활들이 거리낌 없이 등장한다. 이 이미지들은 미화되거나 조작되지 않고, 작가가 경험했던 시간들을 과감하고 솔직하게 보여준다. 작가가 사용한 매체인 사진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기록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드러내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작가는 카메라를 자신과 피사체의 경계를 구분 짓는 장치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촬영의 주체이면서도 동시에 그 장면 속에 포함된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예컨대 연인의 폭행으로 인해 멍든 자신의 얼굴을 촬영한 ‘Nan One Month After Being Battered’에서는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삶의 현장을 전달한다. 사진 속 그녀의 얼굴은 부어오른 눈과 멍 자국으로 뒤덮여 있지만 공허하면서도 무던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제목에서부터 그녀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추측할 수 있겠지만, 작가가 제공한 이미지는 그 사건의 전말을 넘어 보이지 않는 감정선에 이입하게끔 관람자들을 유도한다. 이에 따라 관객들은 사건이 가지는 단편적인 폭력성보다 그 이후 남겨진 감정의 무게를 인식하게 된다.
골딘의 사진 작업이 강한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연출된 허상이 아니라 작가가 실제로 거쳐온 경험의 시간에서 비롯된 장면이기 때문이다. 낸 골딘의 작업은 관계와 환경을 끊임없이 기록함으로써, 그 안에 스며 있는 본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녀는 ‘나’라는 주체를 중심에 두되, 언제나 타인과 세계 속에 복잡하게 얽힌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평생의 시간 속에서 맺어온 관계와 자리한 환경이 어떤 한 사람의 초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골딘의 자화상은 고정된 일률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동하는 자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골딘의 사진은 자화상이 개인의 얼굴을 재현하는 장르를 넘어, 삶의 과정에서 형성되어 온 정체성의 표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Copyright ⓒ 문화매거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