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유정 작가] 화려하지 않다. 이것은 지고한 애씀이다.
무엇에 대한 애씀인가? 각자가 좇고 있는 진리를 화면에 드러내는 애씀이다.
무언가에 힘을 쓰고 난 후엔 공허가 동반한다. 바닥이 보일만큼 힘을 소진했거나 기대한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매 전시 후에 나는 이 공허에 짓눌린다.
화려하고 따뜻한 SNS 단편 너머 작업과 생활은 길을 찾아 헤매는 은둔자와 같다. 반복되는 이 생활상이 처음도 아닌데 번번이 무언가에 잠식되는 모양이다. 그 시간을 부정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금 더 유연하게 덜 무력해 할 수는 없을까’ 바라며 유정의 생활보다 긴 시간을 겪은 이들에게 경험을 구했다.
아래는 그것을 구분한 경우에 따른 나의 경험과 그들의 답변을 같이 놓았다. 나와 같이, 또 우리와 같이- 내 갈 길에 스스로가 등불을 비치고 있는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도 힘이 되길 바란다.
1. 소진했을 때
요즘엔 나의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의 잔류량이 이미지화 될만큼 느끼며 지내고 있다. 당연히 오랜기간 가장 큰 에너지의 드나듦이 극명한 전시 준비-클로즈 기간 동안은 그 흐름이 분명하다. 곡예사가 곡예를 하듯 다루던 에너지는 전시가 마무리되는 순간 모두 소진된다. 그때마다 한 마디 소리내 말한다. “와아, 바닥이다. 고갈됐다. 누워야 한다.”
이와 함께 공허함, 무력감, 파악할 수 없는 슬픔이 내 속에 들어온다. 이때가 종종 위태롭다.
A.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그럴 수도 있고, 전시라는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도 같아요. 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소진한다고 결과가 베스트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요.
(중략) 그 멜랑꼴리함의 극복을 위해 전시 후에 할 일을 몇 가지 놓아 두는 버릇이 생겼어요. 새로운 재료를 사놓는다던가, 전시하고는 전혀 다른 그림을 몇 개 그려 놓던가 등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요. ‘바로 뭔가가 이어지도록이요.’”
2. 위치를 잃었을 때
많은 그룹전이 참여하는 작가 개개인의 역량이나 생산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 몇 점으로 대체된다. 설치 당일 작품을 직접 운송하는 이들도 있고, 작품만 배달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것이 가능한,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시스템에서 참여작가는 ‘여기에 내가 있었다’ 라고 몇이나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인지하고 있을까?
몇몇 이들이 그룹전을 ‘아쉽다’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비대면도 충분한 이 현장에서 내가 맺는 것은 나와 나의 작품의 관계뿐, 외부와의 관계성이 희미한 것이다. 또한 나의 신체로부터 비롯된 역할 경험이 없다는 것은 (작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장에서의 내 역할 또한 없다-라고 인식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다시 말해 우리는 혼자 작업하지만 전시는 관계가 얽힌 현장에서 작동한다. 내가 거기에 있었는지 불분명할 때 공허가 발생하는데, 이는 앞서 이야기한 소진과는 다른 ‘관계적 존재가 가지는 불안’이라고 생각한다.
A. “(중략) 전시에서 내 역할이 모호하거나 관객과의 접점이 명확하지 않은 프로젝트에서는, 참여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겉도는 듯한 소외감을 느끼기도 해요. 단순히 설치와 철수라는 기능적인 역할만 수행한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들 때면, 오히려 전시 이후에 심리적 긴장감이 더 크게 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순간부터는 이 또한 작업의 연장선에서 자연스럽게 통과해야 하는 하나의 구간처럼 받아들이는 중이에요.”
3. 과정 중 허무했을 때
내 능력이 부족하여 절망하고 낙담하지만 포기할 수 없어 이를 문 기억이 허다하다. 다만 ‘마감은 반드시 지킨다’를 디폴트 값으로 설정한 채 지내고 있기에 일시중지하는 방법을 몰라서 ‘과정 중의 허무함’을 건너 뛴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지금 그것을 확인하면 마감까지 완주하지 못할 내 자신의 나약함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눈을 감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A. “저는 무언가를 끝내고가 아니라, 하는 중간에 공허함을 느끼곤 해요. 끝내고 나면 그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거든요. 물론 신체의 에너지가 빠져 나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또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다만, 진행하는 중간에 혼란스럽고 공허해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감정에 휩쓸려요. 하지만 모두 진행한 수의 허무함은 잘 느끼지 않아요. 그냥 속이 시원해요! 끝냈다는 그 마음이 개운해요.”
4. 성취했을 때
들어오는 기회를 정신없이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정신없이 해내고 나면, 정작 나는 잠 자는 시간을 확보하여 회복하기도 빠듯하다. 그런 나에게 혹자는, 그 전시가 진행된 곳은 멋진 장소였고, 근사한 사람들과 함께 했으며 좋은 결과까지 있었으니 굉장하다고 감탄한다.
그런데 나는 왜 내 상황을 타인보다도 감각해 내지 못했을까. 왜 충만함을 느끼지 못했을까. 이는 에너지의 소진과는 다른 문제였다. 분명 사랑해마지않는 일이 스무스하게 진행되었음에도 나는 왜-
A. “한동안 허무함이라는 느낌에 빠져있었어요, 아리러니하게도 상업적으로 가장 좋은 때였어요. 아마도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리 노력했어도 그 다음은 더 잘 해야 하니, 스스로를 칭찬할 수 없었고, 지금 자리잡지 못하면 도태된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해도 계속 이런 미래라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을 만큼요.
그런데 의의로 ‘망했다’는 생각이 든 뒤로 망한 김에 더 망해본다는 생각이 들며 나아졌어요. 기대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이것은 하나의 점이자, 묘목이며, 결국 나는 숲을 만들고자 하는 자이기에 허무할 필요가 없다고요.
나는 아직 마치지 않았기에 지금 허무할 필요가 없는거에요. (중략)”
여기까지. 올해 내가 만난 보배들의 이야기를 빌려 왔다.
거창한 서문은 아니었으나, 창작자가 몰입하고 빠져나오는 경로에서 겪어내는 이 이야기가 누구에게든 등불이 될 것임에 믿어 의심치 않으며 적었다. 아래는 그에 이어 내가 좋아하는 타로카드 한 장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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