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유정 작가] “이것은 마라톤이다.”
작업하며 이따금씩 되뇌는 말인데도 왜 매번 잊는지, 다시 발음해본다. 이것은 마라톤이다.
마라톤 트랙을 허공에 그으며 잠을 청한다. 출근하지 않는 월요일과 화요일은 처절하게 눈을 뜨지 않으려 한다. 두통이 일어 더 이상 잘 수 없을 때 상체를 일으키곤 하는데 이를 도피라 부르기엔 가벼운 감이 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사나흘만 더 출근이 없으면 좋겠다, 적당히 자고 일어나 조급하지 않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람이 적은 도로 앞 테이블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초원에서 맨발로 전력 질주를 하고 싶다, 그 모든 시간이 ‘해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굴러가지 않으면 좋겠다-
이 공허한 바람을 등에 업고 잠에 드니 무엇이 현실인지 분간이 안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도 일어나 외출준비를 한다. 너무 많이 자서, 햇빛을 보지 않고 너무 오래 누워 있어서 아픈 머리를 붙잡고 겨우 일어날 때는 더이상 작업을 미룰 수 없을 때다.
누워 있는 동안 머릿속으로만 반복한 배접할 거리들을 아주 천천히 해결했다. 풀칠도 붓질이라고 조금 살아난 의지를 쥐고 종이 위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요즘 통 무엇을 그리는지 몰라 헤매던 그대로 컬러와 모양이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때를 기다린듯 헤아릴 수 없는 별의 점들만큼이나 작고 아득히 차오로는 충만함의 기포를 느끼며 알았다.
‘장대한 회화’를 굉장히 욕심내며 벼르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기깔나게 꽉 들어차 촘촘한 요소들이 화려한 그림을 좋아하는 것과 내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행위는 다르다
그렇다면 그 수백, 수만의 요소들이 어떻게 배치되길 원하는가?
나는 그것들이 일목요연하게 아주 정교한 서랍에 들어가듯 놓여지면 좋겠다, 내가 그것들을 그렇게 놓을 줄 알면 좋겠다
디자인. 회화보다 디자인에 가깝다
이야기를 기록하는 설계와 도안이 필요하다
생각에 마침표가 찍히면서 내 속에 별과 해와 달이 함께 떠올랐다.
그 디자인이란 쪼개진 단면들이 새롭게 구성되어 서사의 단편이 드러난 장면이다. 정물과 풍경,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는 것들이 나뉘고 재배열된 화면. 직선과 곡선, 비움과 채움, 마름과 번짐에 의해 완전히 재구성된, 다른 세계에 존재할 법한 장면을 원한다.
그간은 스킬이 뛰어난 풍성한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는 스스로의 압박에서 지냈다. 그보다 내 집요함이 구성한 배열이라면, 디자인이라면- 조금 더 망설이지 않을 수 있겠다- 와 같은 생각을 이으며 단정할 수 있었다.
회화와 회화답지 않은 것 간의 어쭙잖은 정의는 지금의 내 역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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