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미술 작가 읽기③] 천경자: 화려한 슬픔으로 빚어낸 뱀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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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미술 작가 읽기③] 천경자: 화려한 슬픔으로 빚어낸 뱀의 전설

투데이신문 2026-02-27 23:35:06 신고

미술 작품은 완결된 의미를 먼저 제시하지 않는다. 화면 위에 남은 색과 선, 형태와 구조가 감각을 자극하고, 관객은 그 표면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화면이 형성해 온 질서를 읽게 된다. 이러한 질서는 작가 개인의 취향이나 단일한 제스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작품은 작업이 축적돼 온 시간과 조건, 반복된 선택의 결과가 응집된 상태로 화면에 남는다.

국내 여성 작가들의 작업을 중심으로 화면을 살펴보는 일은, 이러한 축적의 과정을 보다 구조적으로 읽기 위한 접근이다. 한국 미술의 제도와 서사 속에서 여성 작가들의 작업은 오랫동안 개별 성취로 호명돼 왔고, 그 과정에서 작업이 형성된 시간과 조건들은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다. 화면에 남은 선택과 반복의 흔적을 따라가는 방식은, 결과로서의 형식 너머에서 작업이 만들어진 맥락을 다시 살피게 한다.

색의 농도와 대비, 선의 흐름과 방향, 반복과 균형의 리듬은 즉흥처럼 보이지만 치밀한 조율의 결과다. 화면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서로를 지탱하며 하나의 상태를 유지하고, 반복 속에서 생기는 미묘한 차이와 여백은 화면의 긴장을 지속시킨다. 작품은 단번에 해석되기보다, 관객이 머무르는 시간만큼 천천히 읽힌다.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의 김보아 학예연구사는 이러한 화면의 흐름과 밀도를 중심으로 작품을 바라본다. 형식의 외형보다는, 여성 작가들의 작업이 화면 안에서 어떻게 축적되고 유지돼 왔는지를 짚으며 감상을 해석이 아닌 읽기의 과정으로 확장한다.

천경자 작가 [사진=뉴시스]
천경자 작가 [사진=뉴시스]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고독이 거미줄처럼 쳐 있다”

천경자(1924-2015)는 한국 화단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감을 남긴 여성 화가 중 한 명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한국화의 주류는 먹을 중심으로 한 수묵화였지만, 천경자는 그 흐름에서 과감히 벗어나 선명한 원색과 짙은 채색을 선택했다. 그렇게 그는 누구와도 닮지 않은 회화 언어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천경자의 작품을 떠올릴 때 화려한 꽃, 이국적인 여인, 혹은 머리 위에 뱀을 이고 있는 강렬한 인물상을 먼저 기억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감싸는 이 찬란한 빛은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를 ‘꽃과 영혼의 화가’라 불렀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그 눈부신 색채의 밑바닥에 깊고 질긴 고독을 묻어두고 있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아름다운 대상을 재현하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비극과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겹겹이 쌓아 올린 색의 성벽이었고, 상처와 슬픔을 찬란한 예술로 바꾸어 내기 위한 사투의 현장이었다. 그래서 천경자의 화려함은 가볍지 않다. 오히려 그 화려함은 가장 어두운 감정을 통과한 뒤에야 도달할 수 있는, 슬픔의 다른 얼굴에 가깝다.

지난 2024년, 천 화백의 차녀 수미타 김이 예술총감독을 맡아 전남 고흥군 분청문화박물관에서 진행된 천경자 100주년 기념 특별전 ‘찬란한 전설, 천경자’ 전경 [사진=뉴시스] <br>
지난 2024년, 천 화백의 차녀 수미타 김이 예술총감독을 맡아 전남 고흥군 분청문화박물관에서 진행된 천경자 100주년 기념 특별전 ‘찬란한 전설, 천경자’ 전경 [사진=뉴시스] 

“어매, 이 집 난리났네에...” 다듬잇돌 위 운명의 연극

천경자의 예술적 원형은 1924년 전남 고흥의 푸른 바닷가 마을에서 시작된다. 그의 내면에 색채의 감각을 처음 심어준 것은 외조부의 정원과 어머니의 바느질 상자였다. 외가 뜰에 피어 있던 달리아와 수국의 선명한 빛깔, 어머니의 비단 바구니 속에서 흘러나오던 다채로운 색감은 어린 천경자의 감각 속에 깊이 각인되었고, 훗날 그의 화폭을 지배하게 될 원초적 색채 감각의 밑바탕이 됐다.

유년 시절 눈에 새겨진 꽃의 형상과 천의 결, 빛깔의 농담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그의 그림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천경자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화려한 꽃, 인물의 옷자락을 물들이는 짙은 색조, 화면 전체를 감싸는 현란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는 단지 후천적인 기법의 결과가 아니라, 어린 시절 고흥의 풍경과 생활 감각이 오랜 시간 그의 내부에서 숙성된 끝에 예술로 되살아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봄이 오고 있다. 이제 곧 내 고향 고흥 땅에는 하얀 오랑캐꽃이 피고, 참꽃도 애처롭게 피어날 것이다. 건넌뱅이 언니 등에 업혀서 본 살구나무도 다시 연분홍 꽃을 피울 것이고.

꽃을 좋아하던 할아버지 덕분에 뜰 가득 환하게 꽃이 피어 있던 옥하리 외가 초가집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짜야, 짜야’ 부르시던 외할아버지, 귀염머리 땋아 주시던 외할머니. 밥도 맛나고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도 재미나던 옥하리 외가 시절을 잊을 수가 없다”-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中

지난해 서울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전시회 전경 [사진=뉴시스]
지난해 서울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전시회 전경 [사진=뉴시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옥자’였다. 그러나 그는 열일곱 무렵, 본명 ‘옥자’를 스스로 버리고 ‘거울 보는 여자’라는 뜻의 ‘경자(鏡子)’로 개명한다. 이는 단순한 이름 변경이 아니라, 남이 정한 삶이 아닌 자기 손으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찾아온 공허함 속에서도 그가 끝내 붙든 것은 그림이었다. 천경자에게 미술은 취미가 아니라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출구였다. 그러나 화가가 되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보수적이었던 아버지는 딸의 유학을 완강히 반대했다.

그런 아버지 앞에서 열여덟의 천경자는 다듬잇돌 위에 앉아 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이른바 ‘실성한 연기’를 벌였고, 결국 도쿄행 허락을 받아낸다.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벌였던 이 처절하고도 당돌한 연극은, 훗날 그가 평생 예술을 대했던 태도와 닮아 있다. 천경자의 삶은 처음부터 순응이 아니라 돌파로 이뤄져 있었다.

지난 2024년, 천 화백의 차녀 수미타 김이 예술총감독을 맡아 전남 고흥군 분청문화박물관에서 진행된 천경자 100주년 기념 특별전 ‘찬란한 전설, 천경자’ 전경 [사진=뉴시스] <br>
지난 2024년, 천 화백의 차녀 수미타 김이 예술총감독을 맡아 전남 고흥군 분청문화박물관에서 진행된 천경자 100주년 기념 특별전 ‘찬란한 전설, 천경자’ 전경 [사진=뉴시스] 

생태(生態) : 하루라도 사는 길은 그림을 그리는 것 뿐

1952년 5월, 전쟁의 소란이 채 가시지 않은 임시수도 부산의 칠성다방. 대한미협전이 열리던 그곳에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붙드는 그림 한 점이 걸렸다. 화면을 가득 메운 서른다섯 마리의 뱀이 뒤엉켜 꿈틀거리는 천경자의 <생태> 였다.

당시 이 작품은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전시 기간 내내 다방 주방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배치가 작품의 전설성을 키웠다. “주방 구석에 여자가 그린 뱀 그림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기 위해 칠성다방으로 몰려들었고, 뱀 무더기를 보려는 인파 때문에 다방이 밤늦도록 문을 닫지 못했다는 일화까지 남았다. 이는 <생태> 가 당대에 얼마나 강한 충격을 안겼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기이한 뱀 무더기는 천경자에게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순한 기괴함의 연출이 아니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국면을 지나던 그가 끝내 붙든 생존의 형상이었다. 아버지를 여읜 뒤였고, 결핵성 복막염에 걸린 동생 옥희를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끝내 떠나보내야 했던 시절이었다.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채 만신창이가 되어가던 그에게 세상은 지옥에 가까웠다.

“1951년 3월 9일은 우중충한 날이었다. 나와 규식이 두 오누이는 백지에 싼 뼛가루를 들고 막연히 집을 나와 산으로 갈까, 강을 찾아갈까, 발걸음 닿는 데까지 한없이 걸어갔다. ... 회색 뼛가루를 뿌리며 “옥희야 가거라...”하고 악을 쓰며 울먹이는데 규식이는 강가 자갈밭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있었다”-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中

지난해 서울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전시회 전경 [사진=뉴시스]
지난해 서울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전시회 전경 [사진=뉴시스]

동생을 잃은 슬픔과 가난의 무게 앞에서 천경자는 차라리 뱀 수십 마리를 화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고통을 돌파하고자 했다. 그는 뱀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 움직임을 지켜보며, 생명의 미끈하고도 음산한 에너지를 관찰해 자신의 한(恨)을 화폭에 쏟아부었다. 뱀은 공포의 대상이면서도 집요한 생명력의 상징이었고, 그런 점에서 <생태> 는 죽음의 그림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그림으로 읽힌다.

전남여고 교사로 일하며 가사와 양육을 병행하던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그는 밤마다 뱀의 구도를 붙들었다. 1951년 5월 1일 시작한 작업은 불과 25일 만인 5월 25일 완성됐다. 성냥개비를 하나씩 올려가며 세어 넣은 서른다섯 마리의 뱀은 작가가 견뎌낸 고통의 두께였고, 동시에 뱀띠였던 연인 상호를 향한 연민과 사랑이 포개진 마음의 지층이기도 했다.

결국 천경자의 <생태> 는 끔찍한 형상을 빌려 가장 깊은 슬픔을 정면으로 돌파해낸 작품이었다. 그것은 한 여성 화가가 자신의 비극을 회피하지 않고 끝내 예술로 견뎌낸 기록이자, 지독한 고독 속에서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던 생존의 선언이었다.

지난해 서울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전시회 전경 [사진=뉴시스]
지난해 서울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전시회 전경 [사진=뉴시스]

고독한 유랑 : 지구 끝에서 찾은 나만의 전설

천경자는 평생 여행하며 자신의 삶을 화폭에 기록한 노마드(Nomad) 화가였다. 한곳에 머무르기보다 끊임없이 이동하며, 낯선 풍경과 사람들 속에서 자기 내면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한 예술가이기도 했다.

1969년 이후 그는 유럽과 남태평양을 여행했고, 1972년에는 베트남전 종군화가로 참여했으며, 1974년에는 아프리카를 찾았다. 이후 1990년대까지 세계 각지를 오가며 마주한 풍경과 인간의 표정을 강렬한 색채로 화폭에 옮겼다. 문학과 영화, 공연예술 또한 고독한 삶을 견디게 한 위안이자 작품 세계를 확장한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후기작에 이르면 천경자의 강렬한 원색과 세밀한 묘사는 한층 깊어진다. 특히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접한 뮤지컬 <캣츠> 시리즈는 유년 시절 곡마단 ‘협률사’를 보며 품었던 동경과 금기의 기억을 다시 불러내며, 화면에 역동적이고 생생한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봄이 오면 곡마단 ‘협률사’ 신파가 들어와서 봉황산 기슭 나락 벤 터에 덕석을 깔고 차일 막을 쳐 무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곳에서 흥행흥행 피리소리에 맞춰 징 치는 소리, 슬픈 나팔 소리, 북소리 곡조가 울려오면 오만 간장 흔들렸다.

빤득빤득 금종이 붙인 옷 걸친 곡마단 아가씨들 줄 타고 재주넘으면 어린 가슴 설레고 그것이 부럽기 그지없었으나, 어른들은 곡마단에 잡혀간다고 밖에 못 나가게 애들 단속에 신경쓰던 시대였다”-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中

지난해 서울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전시회 전경 [사진=뉴시스]
지난해 서울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전시회 전경 [사진=뉴시스]

유년의 기억 속 무대는 천경자에게 설렘과 금기가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어른들은 곡마단에 잡혀간다며 아이들을 단속했지만, 어린 천경자에게 그곳은 눈부시고도 위태로운 자유의 세계로 남았다. 금지되었기에 더욱 강렬했던 그 장면들은 오래도록 내면에 머물렀고, 훗날 브로드웨이의 화려한 공연과 만나 다시 살아났을 것이다.

그의 <캣츠> 연작은 출연 배우들의 ‘광기’와 ‘습기’ 어린 에너지를 붓끝으로 옮겨낸 작품들이다. 어두운 무대 위 배우들은 각기 다른 표정과 시선으로 긴장감을 만들고, 현란한 의상과 과장된 몸짓, 인간을 풍자하는 뮤지컬의 주제 의식까지 한 화면에 응축된다. 세밀한 묘사와 역동적인 구도는 무대의 리듬을 그대로 옮긴 듯한 생동감을 자아내며, 정지된 회화임에도 막이 오른 공연처럼 살아 움직인다.

이처럼 천경자에게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안의 고독을 다른 세계의 색으로 번역하는 일이었고, 상처를 외부의 풍경과 만나게 해 또 다른 전설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지난 2024년, 천 화백의 차녀 수미타 김이 예술총감독을 맡아 전남 고흥군 분청문화박물관에서 진행된 천경자 100주년 기념 특별전 ‘찬란한 전설, 천경자’ 전경 [사진=뉴시스] 
지난 2024년, 천 화백의 차녀 수미타 김이 예술총감독을 맡아 전남 고흥군 분청문화박물관에서 진행된 천경자 100주년 기념 특별전 ‘찬란한 전설, 천경자’ 전경 [사진=뉴시스] 

다시, 꽃과 뱀 사이에 선 여인

천경자의 예술 인생을 관통하는 것은 꽃과 뱀, 그리고 여인이다. 꽃은 어린 시절 외가의 기억에서 비롯되었고, 뱀은 생존의 독기 속에서 태어났으며, 여인은 결국 자기 자신을 투영한 형상이다. 그의 삶과 시간, 기억과 상처가 하나씩 이미지가 되어 화면 위에 정착한 셈이다.

사람들은 그를 ‘꽃과 영혼의 화가’라 불렀지만, 사실 그의 그림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려진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너질 듯한 영혼을 끝내 지켜내기 위해 그려진 그림에 가까웠다. 고독은 그를 쓰러뜨리려 했지만, 천경자는 오히려 그 고독을 누구보다 뜨거운 색채로 치환해냈다.

▲김보아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학예연구사<br>동국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동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 석사를 졸업했다. 뮤지엄과 관람객을 잇는 예술경영과 문화매개 연구에 주력하고 있으며 서울시립미술관, 환기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현재는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보아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학예연구사
동국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동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 석사를 졸업했다. 뮤지엄과 관람객을 잇는 예술경영과 문화매개 연구에 주력하고 있으며 서울시립미술관, 환기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현재는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작품은 단지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미술사 속에서 여성 예술가의 강인함과 독자성을 상기시키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2남 2녀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실패한 결혼 생활을 견뎌낸 한 인간으로서도 그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의 예술관 또한 끝내 놓지 않았다. 수많은 오해와 비난, 그리고 깊은 고독 속에서도 천경자는 색채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무너지지 않았기에 빛나고, 그의 고독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기에 전설이 됐다. 천경자의 화폭이 지금도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찬란한 색의 이면에,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슬픔과 의지가 고스란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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