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마운트가 주당 31달러, 총 1110억달러(약 160조원)의 승부수를 던지자 넷플릭스는 “더 이상 재무적으로 매력적이지 않다”며 26일(이하 현지시간) 공식 철수를 선언했다. 8차례 퇴짜를 맞으면서도 끈질기게 워너브라더스의 문을 두드려온 파라마운트가 극적인 역전극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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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는 왜 포기했나
넷플릭스는 지난해 12월 워너브라더스의 스트리밍·스튜디오 사업을 주당 27.75달러, 총 827억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협상 주도권은 넷플릭스에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파라마운트가 CNN을 포함한 워너브라더스 전 사업부를 대상으로 한 ‘전체 인수’ 카드를 꺼내들며 가격을 단계적으로 올리자 상황이 뒤집혔다.
워너브라더스 이사회는 26일 파라마운트의 제안이 넷플릭스의 기존 계약보다 주주에게 유리하다고 공식 판단했다. 넷플릭스에는 4영업일 내에 맞대응 제안을 낼 권리가 주어졌지만 넷플릭스는 포기했다.
테드 사란도스·그렉 피터스 넷플릭스 공동 최고경영자(CEO)는 “이 거래는 적절한 가격이라면 있으면 좋은 것이었지, 어떤 가격에서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넷플릭스 내부 관계자는 로이터통신에 “더 이상 억만장자와의 가격 전쟁에 응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털어놨다. ‘억만장자’는 오라클 창업자 래리 앨리슨을 가리킨다. 래리 앨리슨은 파라마운트 CEO 데이비드 앨리슨의 부친으로, 이번 거래에서 457억달러(약 66조원) 규모의 지분 보증을 직접 제공했다.
시장은 넷플릭스의 철수를 반겼다. 앞서 지난해 9월엔 넷플릭스가 워너브라더스 잠재 인수자로 거론되면서 시가총액 1700억달러 이상이 증발한 바 있다. 이번 인수 포기 소식에 넷플릭스 주가는 이날 시간외 거래에서 한때 13% 급등했다. 투자자들의 안도감이 반영된 결과다. 넷플릭스는 인수 철회 대가로 워너브라더스로부터 위약금 28억달러(약 4조원)를 받게 되며, 파라마운트가 이 금액을 대신 지불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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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마운트의 승부수, 어떻게 가능했나
파라마운트의 역전극은 치밀한 재무 설계 위에서 이뤄졌다. 뱅크오브아메리카·씨티그룹·아폴로글로벌이 총 575억달러(약 83조원)의 부채 금융을 제공하기로 확정했다. 래리 앨리슨 트러스트가 457억달러 규모의 지분을 보증했다. 규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거래가 규제 당국의 불승인으로 무산될 경우 워너브라더스에 70억달러(약 10조원)의 위약금을 지급하고, 올해 말까지 합병이 성사되지 않으면 내년부터 분기당 주당 0.25달러의 지연 보상 수수료도 부담하기로 했다.
파라마운트는 이번 합병을 통해 60억달러(약 8조6000억원) 규모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데이비드 자슬라브 워너브라더스 CEO는 “이사회가 합병안을 채택하면 주주들에게 엄청난 가치가 창출될 것”이라고 밝혔다.
행동주의 투자자 앙코라홀딩스는 “넷플릭스의 철수는 주주들이 더 많은 현금을 받고 규제 승인의 실질적인 길을 걸을 수 있게 했다”며 “주주와 산업 모두에 윈윈”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변수, 인수전을 뒤흔들다
이번 인수전은 단순한 기업 간 경쟁을 넘어 미국 정치 지형과 맞닿아 있었다. 래리 앨리슨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핵심 지지자다. 반면 넷플릭스의 공동 창업자는 민주당의 주요 후원자로, 진보 성향의 기업 문화가 트럼프 대통령과 마찰을 빚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넷플릭스가 워너를 인수하면 스트리밍 시장 점유율이 문제가 될 수 있으며 내가 결정에 관여하겠다”고 공개 발언했다. 지난 12일에는 합병·인수 심사를 담당하는 법무부 고위 인사를 전격 해임했다. 지난 21일에는 민주당 정권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수전 라이스 넷플릭스 이사를 즉각 해임하지 않으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직접 압박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앨리슨은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에 공화당 의원 린지 그레이엄의 초청으로 참석했다. 사란도스 넷플릭스 공동 CEO는 합병 포기 선언 당일 법무부의 반독점 심사 담당 고위 당국자들과 면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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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은 “트럼프 대통령의 개입이 넷플릭스에 역풍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복수의 미디어 업계 관계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목표는 ‘CNN 해체’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CNN은 트럼프 대통령이 오랫동안 적대시해온 진보 성향 언론의 상징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해 12월 데이비드 앨리슨이 미 행정부에 “파라마운트가 인수하면 CNN이 반(反)트럼프 보도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명확히 했다고 보도했다.
◇미디어 지형의 대격변, 이제 어디로
이번 합병이 완료되면 파라마운트-워너브라더스 연합은 스트리밍(HBO맥스·파라마운트+), 방송(CBS·CNN), 케이블(TNT·TBS·MTV·니켈로디언 등), 영화 스튜디오(워너브라더스·파라마운트픽처스), 대형 IP(해리포터·배트맨·반지의 제왕)를 동시에 거머쥔 초대형 미디어 그룹이 된다.
스트리밍 시장 판도 변화도 주목된다. 닐슨에 따르면 현재 미국 스트리밍 시장 점유율은 유튜브가 12.7%로 1위이며, 넷플릭스는 9%, 워너브라더스는 1.4%다. 합병 이후 파라마운트+와 HBO맥스가 결합한 새 플랫폼이 넷플릭스를 직접 겨냥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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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미국과 유럽의 반독점 심사에 최소 1년 안팎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앨리슨 가문과 트럼프 대통령의 친분에도 불구하고 대형 미디어 합병이 속전속결로 승인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민주당 의원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파라마운트-워너브라더스 합병은 반독점법상 재앙이며 미국 가정의 선택권을 빼앗는다”고 비판했다. 버니 샌더스, 리처드 블루멘솔 의원 등도 거래가 정치적 특혜로 얼룩졌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소속 롭 본타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은 “두 할리우드 거인이 규제 심사를 통과한 것이 아니다. 캘리포니아 법무부는 강력히 검토할 것”이라며 독자적인 법적 검토 방침을 밝혔다.
언론 자유 문제도 뜨거운 논란거리다. CBS와 CNN을 동시에 소유하는 미디어 그룹이 탄생하는 것을 두고 언론 감시단체 프리프레스의 크레이그 애런 공동 CEO는 “파라마운트가 CBS와 CNN을 모두 장악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경고했다. CNN의 마크 톰프슨 대표는 직원들에게 “세부 사항이 분명해질 때까지 결론을 서두르지 말라”며 내부 동요를 진정시키는 데 급급한 모습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국제 보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CNN의 보도 방향이 중동·중국 등 주요 국제 현안에서 달라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파라마운트는 이미 스카이댄스가 파라마운트를 인수한 뒤 CBS 뉴스 편집장에 보수 성향 언론인 바리 와이스를 임명하며 “중도 좌파에서 중도 우파 사이의 시청자를 공략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편집 방향이 CNN까지 확대될 경우 미국 언론 지형 자체가 재편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결국 이번 합병의 최종 성패는 규제 당국의 판단에 달려 있다. 파라마운트는 넷플릭스보다 규제 리스크가 낮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두 개의 대형 뉴스 조직을 한 손에 쥐는 구조는 전례 없는 심사 기준을 적용받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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