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 칼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방법③ 헛헛한 마음에 이어
[문화매거진=이응 작가] 지난 세 편의 글이 언어의 한계와 오해, 그리고 번역의 가능성을 다루었다면, 오늘의 목적지는 그 모든 사유가 맞닿아 있는 근원적인 지점이다. 어쩌면 이 여정은 처음부터 하나의 종착지를 향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음’이라는 침묵이 가장 선명해지는 ‘상실’의 자리다. 오늘은 상실을 ‘말할 수 없음’의 형태로 바라보려 한다.
지금까지 다루어 온 ‘말할 수 없음’이라는 거대한 화두를 보다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 심장부에는 언제나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감각이 단단히 박혀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응시할 본질은 상실을 기반으로 발생하는 ‘말할 수 없음’이라는 현상 그 자체에 있다.
상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면, 말할 수 없음은 ‘그 일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상실은 무엇인가.
대개 우리는 소중한 ‘대상’을 잃어버리는 일을 상실이라 부른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주목하려는 상실은, 대상 하나의 부재를 넘어 그것과 함께 작동하던 나의 세계가 통째로 흔들리는 사태에 가깝다.
이러한 상실은 대개 일상의 궤도를 완전히 이탈하게 만드는 거대한 충격이나 트라우마를 동반한다. 그것은 때로 사회적 참사와 같은 집단적 고통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개인의 삶에서 가장 가깝고 당연했던 존재가 갑작스럽게 부재하는 사적인 비극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사건의 층위는 제각각일지라도 이들이 공유하는 공통점은 개인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거대하여, 그동안 삶을 지탱해 온 ‘세계에 대한 기본 가정’들을 일시에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언어가 작동을 멈춘다. 사건의 규모 때문이라기보다, 말이 기대어 서 있던 ‘조건’들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언어는 본래 선형적인 시간의 질서를 따르지만, 우리가 겪는 충격은 앞뒤 없이 산발적으로 들이닥친다. 시간의 축이 무너진 자리에서 문장은 길을 잃고 흩어진다.
또 어떤 진실은 언어로 옮기는 순간 축소되고 훼손되기에, 침묵은 때로 그 진실을 보존하려는 가장 성실한 저항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거대한 상실은 말을 내뱉어야 할 ‘주어’ 자체를 흔든다.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기대던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 문장은 성립되지 못하고 대개는 거친 호흡만 남는다.
말은 종종 ‘있음’을 가리키는 쪽으로 먼저 뻗어 나간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사과, 책상, 사람에게 이름을 붙이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서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은 대개 ‘공기’와 같아서, 그것이 작동하고 있는 동안에는 굳이 이름을 불러 확인할 필요가 없다. 우리 삶을 지탱하는 본질적인 가치들은 대개 너무나 당연하게 작동하고 있어 의식조차 되지 않는 ‘투명한 배경’과 같기 때문이다.
예컨대 하이데거의 도구 논의 중 우리가 도구를 완벽하게 사용하고 있을 때, 그 도구는 우리 의식에서 사라진다고 말했다. 망치질을 잘하는 목수는 망치를 의식하지 않는다. 망치는 목수의 손과 하나가 되어 ‘투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배경의 투명성’이라 하는데, 이 배경은 그것이 ‘고장 났을 때’ 비로소 의식 위로 떠오른다. 망치가 부러진 목수는 ‘아, 망치가 있었지’ 하고 망치를 바라보게 되는 원리다.
이 원리는 삶에서도 반복된다. 우리가 누리던 안전한 일상, 소중한 관계는 ‘투명한 배경’과 같다. 그것이 사라지는(고장 나는) 순간에야 우리는 그 존재를 인식하지만, 평소에 투명했기에 그것을 부를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 투명한 배경에는 ‘세계의 일관성’ 같은 것들도 포함된다. 내일도 오늘과 같은 해가 뜨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여전할 것이라는 믿음. 우리는 그 믿음을 구태여 이름 붙여 부르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상실은 그 일관성을 무너뜨린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지 말하려 하지만, 평소에 부른 적 없던 그 믿음을 가리킬 단어를 곧장 찾지 못한다. 고통은 실재하는데, 그것을 가리킬 손가락(언어)이 없는 상태.
이때 흔들리는 것은 단어만이 아닌 그 단어로 지탱되던 ‘나의 자리’도 함께 흔들린다. 그렇다면 진실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사라짐으로써 함께 죽어버린 ‘나의 일부’가 아닐까. 내가 사라졌으니, 받아들일 ‘나’조차 남지 않은 상태다.
이름을 붙이지 못한 상실은, 마침내 ‘나’의 이름까지 흐리게 만든다. 이 상태를 가장 잘 가리키는 말로, 나는 멜랑콜리를 떠올린다.
이토록 말이 닿지 않는 자리가 우리를 한동안 멈춰 세우는 이유는, 그 투명한 배경이 사실은 대상과 내가 긴 시간 함께 맞춰온 ‘삶의 리듬’이었기 때문이다. 말투와 숨, 약속과 반복, 하루의 순서 같은 것들. 한 대상의 부재는 단순히 하나의 실종이 아니라, 그 대상과 함께 연주하던 선율이 갑자기 중단되고 낯선 엇박이 시작되는 사건이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삶의 박자 위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리듬 속에서 조화를 이루던 ‘나의 어떤 모습’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박자가 어긋난 자리에서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해 서성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잃은 것은 정말 ‘어떤 것’이었을까? 다음 글에서는 이 서성임의 바닥에 있는 더 오래된 공백-근원적 상실-으로 한 걸음 더 내려가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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