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극장가에 새로운 여성 액션 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25일 개봉한 손현우 감독의 '도망쳐'는 납치된 동생을 구하기 위해 범죄조직 본거지로 돌진하는 세 명의 친구 이야기다. 영화는 폭력의 강도나 추격의 속도가 아니라, 관계가 만들어내는 동력을 주목한다. 우정과 팀워크를 서사의 중심축에 고정시키면서 액션의 방향을 재조정한다.
영화의 중심에는 전직 배구선수 출신 ‘수아’(김설희)가 있다. 첫 장면부터 사건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액션은 기술의 과시가 아니라 감정의 분출이다. 분노가 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결단이 몸의 방향을 결정한다. 신체는 감정의 확장 장치로 기능한다.
‘차미란’(여연희)은 태권도 은메달리스트 출신 모델이다. 낮에는 모델, 밤에는 대리운전이라는 이중의 노동 구조는 인물의 현실감을 강화한다. 그의 액션은 직업적 포즈가 아니라 생활의 연장처럼 보인다. 진상 손님을 응징하는 장면은 코미디적 리듬을 가미하면서도, 캐릭터의 성격을 단번에 각인한다. 웃음은 긴장을 풀기보다 오히려 다음 충돌을 예비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오수혜’(신다슬)는 전 유도 국가대표 출신이다. 망설임 없는 돌진, 직선적인 감정, 거친 숨. 이 인물의 액션은 유도 특유의 밀착과 균형 붕괴의 미학을 따른다. 상대의 힘을 흘려보내고 중심을 무너뜨리는 기술은, 서사적으로도 상대 조직의 권력을 해체하는 은유로 읽힌다. 치맥을 사랑하는 일상적 면모는 이러한 강성 이미지를 교란하며 인물의 입체감을 확보한다.
악역 ‘이서현’(이나라)과 ‘장도식’(김장원)은 기능적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폭력의 구조를 체현하는 얼굴이다. 인신매매 조직이라는 설정은 액션의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폭력의 방향을 명확히 한다. 선과 악의 대비는 단선적이지만, 그만큼 충돌의 에너지는 직선적으로 폭발한다. 액션은 도덕적 분노의 시각화다.
영화의 핵심은 케미스트리다. 세 인물은 각자의 종목 배구, 태권도, 유도가 지닌 운동 감각을 다르게 발현한다. 배구의 점프와 스파이크는 수직적 타격의 이미지로, 태권도의 발차기는 선형의 궤적으로, 유도의 메치기는 회전과 낙하의 리듬으로 구현된다. 서로 다른 운동 미학이 한 화면 안에서 충돌하고 교차하며 집단적 액션의 형태를 완성한다. 이는 개인 영웅 서사와 구별되는 집합적 액션의 미학이다.
러닝타임 95분 47초. 영화는 압축된 시간 안에서 속도를 밀어붙인다. 카메라는 과도한 슬로모션이나 스타일리시한 과장을 자제하고, 비교적 직선적인 편집 리듬을 유지한다. 관객은 기술의 화려함보다 충돌의 물성을 체감하게 된다. 타격은 묵직하고, 낙하는 거칠다. 시각적 쾌감은 과장 대신 밀도로 확보된다.
한국 액션 영화는 오랫동안 남성적 신체를 중심에 두어왔다. 폭력은 개인의 고독한 복수나 조직 간 권력 다툼 속에서 소비됐다. 반면 '도망쳐'는 여성 신체를 전면에 배치하면서도 이를 대상화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인물을 응시하기보다 따라간다. 신체는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서사를 밀어붙이는 주체다.
또한 영화는 스타일리시 액션의 과잉과 거리를 둔다. 최근 일부 작품들이 과도한 색채 대비, 음악적 과장, 미학적 포즈에 기대어 ‘멋’을 구축했다면, '도망쳐'는 관계와 감정의 밀도를 우선한다. 액션 장면은 인물의 선택과 직결되고, 곧 관계의 증명으로 이어진다. 미학은 형식의 화려함이 아니라 정서의 응집에서 발생한다.
결국 '도망쳐'의 미학은 ‘연대의 물리학’이라 부를 만하다. 세 인물의 힘은 합쳐질 때 배가된다. 프레임 안에서 이들이 한 방향으로 돌진할 때, 화면은 하나의 벡터를 형성한다. 액션은 개인의 과시가 아니라 공동의 운동이다.
작품은 여성 액션의 외연을 넓힌다. 기술적 완성도나 스케일의 경쟁을 넘어, 관계와 감정을 동력으로 삼는 집단 액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스펙터클을 넘어선 감정의 밀도, 스타일을 넘어선 서사의 응집. '도망쳐'는 또 하나의 분기점으로 기록될 수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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