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김종효 기자 | 인공지능(AI) 기술이 전 산업의 패러다임을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벤처 투자 시장에서는 흥미로운 역설이 포착되고 있다. AI라는 거대한 파고 속에서도 투자자들의 시선은 점차 ‘실체가 있는 물리적 혁신’과 ‘검증된 수익 구조’를 갖춘 비(非)AI 산업군으로 향하고 있다. 기술적 화려함에 가려졌던 에너지, 소재, 라이프케어, 바이오 분야 강소 기업들이 차별화된 비즈니스 모델(BM)을 앞세워 자금을 끌어모으고 있다.
스타트업 성장분석 플랫폼 ‘혁신의숲’에 따르면 2026년 1월 한 달간 신규 투자 유치에 성공한 스타트업은 총 113개사이며 전체 투자 금액은 5059억원으로 집계됐다. 이 중 ‘AI·딥테크·블록체인’ 분야가 27건으로 전체 투자 건수 약 24%를 차지하며 단일 카테고리로는 가장 높은 비중을 기록했으나 역설적으로 전체 투자 70% 이상은 비AI 산업에서 이뤄졌다. 이는 기술 기반 투자가 활발한 와중에도 자본 흐름이 특정 기술 영역에만 매몰되지 않고 산업 전반으로 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탄탄한 매출 구조·검증된 BM, 투자 승패 가른다
비AI 산업 약진을 주도하는 대표 주자는 에너지 기후테크 기업 엔라이튼이다. 엔라이튼은 계열사를 통해 총 300억원 규모 신규 투자를 유치하며 지붕형 태양광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번 투자는 템플턴하나자산운용이 펀드 운용을 맡았으며 확보된 자금은 공장과 물류센터 등 산업시설의 유휴 지붕을 활용한 140MW 규모의 태양광 설비 구축에 전액 투입될 예정이다.
엔라이튼의 경쟁력은 단순 설비 구축을 넘어 부지 확보부터 인허가, 금융 설계, 시공 및 운영에 이르는 전 과정을 통합 수행하는 역량에 있다. 2024년 영업이익 12.3억원을 기록하며 이미 흑자 전환에 성공한 점이 투자자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최근 대기업들의 RE100 이행 및 ESG 경영 수요가 폭증함에 따라 엔라이튼은 지붕형 태양광 기반의 PPA(전력구매계약) 모델을 강화하며 안정적 현금 흐름을 창출하고 있다.
소재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는 커버써먼의 활약도 눈에 띈다. 라이프스타일 테크를 표방하는 커버써먼은 기존 투자사인 인터베스트로부터 후속 투자를 유치하며 누적 투자액 100억원을 돌파했다.
커버써먼은 공기, 열, 빛 등 자연 요소에서 착안한 ‘에어 테크(Air Tech)’, ‘발열 테크(Heated Tech)’ 등 스마트 섬유소재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국내외 지식재산권만 235건에 달한다. 대표 제품인 ‘필로우디(Pillowdy)’는 누적 판매량 10만장을 넘어섰고 미국 GAP 등 글로벌 SPA 브랜드에 소재를 직접 공급하는 성과를 내고 있다.
이재호 커버써먼 대표는 “이번 후속 투자는 글로벌 사업을 안정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기반을 선제적으로 강화하는 데 의미가 있다”며 “글로벌 기준에 맞는 품질·운영 체계를 갖추고 장기적으로 신뢰받는 소재 기술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겠다”고 말했다.
▲현실 세계 데이터 선점, ‘피지컬 AI’ 서비스 부상
디지털 공간을 넘어 현실 세계의 물리적 데이터를 자산화하는 비AI 서비스도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맞춤형 홈오거나이징 플랫폼 ‘열다’를 운영하는 열다컴퍼니는 서울대기술지주로부터 시드 투자를 유치했다. 열다컴퍼니는 단순 정리 대행 서비스가 아니라 고객의 생활 패턴과 물건 데이터를 분석해 ‘지속 가능한 공간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기업이다.
이들은 기존의 고가 프리미엄 서비스였던 정리수납을 비대면 정기 구독 형태로 혁신해 비용을 80% 이상 절감하는 데 성공했다. 목승환 서울대기술지주 대표는 “실생활 공간을 디지털 인프라로 전환하는 ‘Physical AI(물리적 AI)’ 플랫폼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투자 이유를 밝혔다. 열다컴퍼니는 정리수납 과정에서 축적된 물건 단위 데이터를 기반으로 청소, 수리 등 생활 전반을 연결하는 ‘구독형 스마트홈 OS’로의 진화를 꿈꾸고 있다.
예술과 상업을 결합한 아트라미 역시 무신사파트너스와 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시리즈 A 투자를 유치하며 라이프스타일 영역 확장성을 증명했다. 아트라미가 운영하는 ‘뚜누(TOUNOU)’는 아티스트의 작품을 홈퍼니싱, 패션 등 실물 제품으로 제작·판매하는 POD(Print on Demand) 기반 플랫폼이다. 현재 158명의 아티스트와 협업 중인 이들은 매출 120억원 달성과 미국·일본 시장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바이오 헬스케어 분야에서는 파인트리테라퓨틱스가 670억원 규모의 시리즈 B 투자를 유치하며 누적 투자액 1290억원을 기록, 비AI 딥테크의 저력을 과시했다. 이들의 차세대 단백질 분해 기술인 ‘앱렙터(AbReptor)’ 플랫폼은 글로벌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와 5억달러 규모 계약을 체결하는 등 세계적 수준의 원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정책적 뒷받침과 시장의 냉정한 옥석 가리기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비AI 산업의 견고한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벤처 4대 강국 도약 종합대책’을 통해 2030년까지 AI·딥테크 스타트업 1만개 육성뿐만 아니라 에너지, 바이오, 방산 등 ‘6대 전략 산업’에 대한 정책 금융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방산 분야에서는 2030년까지 스타트업 100개를 육성해 제조 중심 산업 구조를 첨단 기술 중심으로 개편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벤처캐피털 업계 관계자는 “AI 기술은 이제 모든 스타트업이 갖춰야 할 기본 사양이 됐지만 실제 투자 결정은 그 기술이 현실에서 어떻게 수익을 내는지, 그리고 글로벌 확장 가능성이 있는지에 달려 있다”며 “실제 수요가 분명한 패션, 라이프케어, 에너지 분야의 매력은 AI 열풍 속에서도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른 관계자는 “투자 트렌드가 ‘기술의 이름’이 아닌 ‘기술의 쓸모’로 회귀하고 있다. AI가 촉발한 디지털 전환이 물리적 세계의 비효율을 걷어내는 비AI 산업의 혁신과 결합할 때 진정한 기업 가치가 창출된다는 사실을 최근 투자 사례들이 증명하고 있다”며 “수익성과 실체를 겸비한 비AI 스타트업들의 약진은 한국 벤처 생태계가 한 단계 더 성숙한 단계로 진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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