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 칼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방법② 완벽한 오해에 이어
[문화매거진=이응 작가] 이번에는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비유’를 빌려 시작해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소통의 불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사고실험을 제안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작은 상자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그 안에 든 것을 ‘딱정벌레’라 부르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누구도 타인의 상자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상자 속 내용물이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텅 비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저 ‘딱정벌레’라는 단어를 주고받으며 아무 문제 없이 대화를 지속한다.
일상에서 쓰는 감정의 언어들도 이 상자와 매우 흡사한데, 옆 사람에게 “나 오늘 너무 헛헛해”라고 말할 때, 내가 느끼는 그 ‘비어 있음’의 질감과 당신이 이해하는 ‘비어 있음’의 무게가 같은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언어는 감정이라는 사적인 상자 위에 붙은 공적인 이름표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아 그 추상도가 너무 높아서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도구는 결국 그가 뱉어낸 언어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이름표들이 사실 우리 몸의 감각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헛헛하다’거나 ‘꼬였다’는 말은 머릿속에만 머무는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가슴이 뻥 뚫리거나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실제 몸의 반응을 동반한다. 마음의 형상을 우리는 마치 헛헛한 공기가 드나드는 공간성이 있는 듯이 언어는 빗대어 표현하곤 한다.
2022년 열린 개인전 ‘헛헛한 마음’은 이 보이지 않는 단어들을 만질 수 있는 사물로 되돌려 놓는 과정이었다. 전시장 안에 놓인 작품들을 통해, 말이 사물이 되는 번역의 시간을 함께 따라가 보고자 한다.
‘헛헛한 마음’ 구멍 난 마음에 입김 불기
전시명과 동명의 제목인 작품 ‘헛헛한 마음’은 ‘비어 있음’이라는 감각을 시각화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먼저 ‘헛헛하다’라는 형용사를 ‘바람이 드나드는 구멍’이라는 물리적 공간으로 옮겼다. 텅 빈 구멍의 테두리는 종이죽과 종이백자로 빚었는데, 가벼운 충격에도 쉽게 바스러지는 연약한 물성에 집중했다.
천장에 매달린 기물들은 관객의 얼굴 높이에서 모빌처럼 흔들린다. 관객이 그 구멍을 향해 ‘후~’하고 입김을 불어 넣으면, 숨결은 텅 빈 공간을 잠시 채우고 이내 빠져나간다. 텅 빈 구멍은 이제 숨결이 드나드는 길이 된다. 공기가 채워졌다 빠져나가는 이 짧은 흐름을 통해, 보이지 않던 마음의 허기는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감각으로 남는다.
‘꼬인 마음’ 해결되지 않은 채 무언가 되어가기
단어를 사물로 바꾸는 시도는 ‘꼬인 마음’에서도 이어진다.
복잡한 심경을 두고 우리는 흔히 “마음이 꼬였다”고 말하듯, 이 작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엉킴에 실이라는 물리적인 몸을 입히는 일이다. 빗이나 컵, 일상의 막대기 같은 사물에 색색의 실을 촘촘히 감아 나가는 행위로, 쌓여가는 실은 사물의 원래 모습과 멀어지고 실뭉치의 모호한 형태와 부피만 남는다. 무엇 하나 또렷하지 않은 언어의 세계에서 실을 감는 행위는 헷갈리기만 하다. 엉킨 문제를 풀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더 깊게 꼬여가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모호한 덩어리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엇인가 되어가는 것 같다.
‘나만 읽을 수 있는 마음’ 타자라는 필터
작품 ‘나만 읽을 수 있는 마음’은 투명한 아크릴판 위에 검은색과 흰색 스티커로 제작된 글자들이 무작위로 섞여 있다.
관객에게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된 두 종류의 돋보기 필터가 제공된다. 흰색 혹은 검은색 필터를 가져다 대면, 필터의 색과 대비되는 글자들만 선명하게 떠오른다. 같은 색끼리 만나면 보이지 않게 되는 이 구조에서, 글자가 제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과 다른 색의 배경이 필요해진다. 작업은 ‘나의 나 됨’을 확인하기 위해 나 아닌 존재가 필요하다는 관계의 속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삶의 형식으로
마음이 말이 되고, 말이 다시 사물이 되는 번역의 과정에서 본질은 조금씩 변형되거나 흩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상자 속의 딱정벌레가 실제로 무엇인지 맞히는 일보다, 우리가 ‘딱정벌레’라는 이름을 공유하며 대화를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주목했다. 그는 이를 ‘삶의 형식(Form of Life)’이라 불렀다.
작업은 ‘헛헛함’이나 ‘꼬임’에 대해 그저 언어가 다 담아내지 못한 당혹스러운 감각들에 형상을 부여하여, 잠시 우리 앞의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이라는 상자 속을 완벽히 들여다볼 수 없기에 끊임없이 서로의 상태를 궁금해하고, 서툰 번역을 거쳐 말을 건넨다.
비록 나의 딱정벌레와 당신의 딱정벌레가 전혀 다른 모습일지라도, 그 차이를 확인하고 감각을 매만지는 일은 계속된다. 완벽한 이해라는 투명한 빙판 위에서 말이 미끄러질 때마다, 우리는 다시 마찰과 오해가 뒤섞인 '거친 대지'로 내려와 일상을 걷는다. 숨을 불고, 실을 감고, 글자를 겹치는 물리적 반복은 결국 완벽히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거친 대지 위에서 기어이 서로의 빈 공간을 더듬어 가는, 투박하지만 구체적인 삶의 실천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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