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 만화를 그리고 싶다④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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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 만화를 그리고 싶다④ 이야기

문화매거진 2026-02-26 11:02:21 신고

[아름다운 것] 만화를 그리고 싶다③ 방법에 이어 
 

▲ 두 장의 그림 / 그림: MIA
▲ 두 장의 그림 / 그림: MIA


[문화매거진=MIA 작가] 조금은 기계적으로 스토리보드 칸을 채워가던 어느 날, 나는 별도의 캔버스에 두 장의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 연속된 컷으로 만들 목적은 없었다. 단지 ‘여자 뒷모습’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린 상태에서 어떤 버전이 좋을까 하여 두 가지로 그려 보았다. 하나는 얼굴이 보일 듯 말 듯한 옆모습으로, 하나는 완전한 뒷모습으로. 그런데 그려 놓고서 두 그림을 이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더니‘고개를 돌려 간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마침 읽고 있던 책 ‘만화의 이해’에서 나의 이런 경험과 연관된 어떤 개념을 발견했다. 바로 ‘완결성 연상(closure)*’이다. 이 개념은 개별로 인지하는 부분들을 동시에 전체로 이해하는 현상을 말한다. 지각 심리학에서 나온 학제적 개념이긴 하지만 우리가 본능적으로, 직관적으로 매번 겪어내는 일상적 행위에 빗대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빠른 시간에 수십 컷을 영사하는 영화나 텔레비전을 보며 하나의 연속된 사건으로 이해하는 경우다. 또한 타인의 모습 일부만 보고도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지인임을 식별해 내는 행위도 완결성 연상에 해당한다.

영상 매체보다 컷 수가 현저하게 적은 만화는 완결성 연상의 효과를 극단적으로 활용하는 매체라 할 수 있다. 스콧 맥클라우드는 “진정한 의미에서, 만화는 완결성 연상 그 자체”라 묘사할 정도다. 그 유형 또한 다양하다. 근소한 시간차를 묘사한‘순간 이동’, 동작이 연결되는 ‘동작 간 이동’, 이야기는 같지만 소재가 바뀌는 ‘소재 간 이동’, 꽤 먼 시간이나 공간이 분절된 것처럼 보여서 추리가 필요한 ‘장면 간 이동’ 등이 있다. (78~79쪽)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컷 사이의 연속성을 한눈에 알아채기 힘든 ‘양상 간 이동’, ‘무관계 이동’에 관한 내용이었다. ‘양상 간 이동’은 대개 분위기나 현장감을 살릴 때 배경 위주로 묘사하는 경우를 말한다. ‘무관계 이동’은 칸과 칸 사이에 아무런 논리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경우인데, 작업자 입장에서 자유도를 높일 수 있는 방편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전 컷에 인물을 그렸더라도 그다음 컷에 뜬금없이 배경만을 등장시키는 것처럼 과감한 시도도 가능하다. 그렇게 하면 우연적인 효과를 노릴 수 있고 독자가 이야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스콧 맥클라우드가 제안한 ‘스토리 기계Story machine**’는 이러한 임의적인 이야기 만들기를 전략적으로 장려하는 보조 도구다. 스토리 기계는 아이디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되었는데, 다양한 도상기호들을 나열해 연결한 회로도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목적은, “이야기를 만드는 발상을 완전히 임의화” 시키는 데 있다. 책에서는 작가가 자기만의 스토리 기계를 고안할 것도 제안한다. 깊은 철학에서 태어나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렇듯 우연성과 임의적인 효과에 기대는 것도 작가를 매너리즘에서 구원하는 획기적인 방법일지 모른다.

▲ '만화의 이해', 스콧 맥클라우드 지음, 김낙호 옮김, 비즈앤비즈
▲ '만화의 이해', 스콧 맥클라우드 지음, 김낙호 옮김, 비즈앤비즈


다시 나의 작업으로 돌아오면, 사실 이 글을 쓰기 전부터 나는 ‘여자 뒷모습’이라는 키워드에서 시작한 그림의 배경을 바꿔가며 여러 장면을 만들어 보고 있었다. 이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불빛이 반짝이는 밤에서 꽃잎이 흩날리는 봄으로, 윤슬이 빛나는 이름 모를 호수로, 불꽃놀이가 한창인 바닷가 한가운데로. 장소뿐만이 아니다. 여자가 다시 화면 가까이 다가오게 할 수도, 타인을 만나게 할 수도 있다. 이야기는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뻗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는 한 가지 목마름이 남아있었다. 장면은 늘어나고 그림은 쌓여가는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계속 허전했다. 이 이야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누구에게 닿고 있는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이유가 바로 독자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만화에서 완결성 연상이 작동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독자 때문이다. 달리 말해 완결성 연상의 주체는 독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만화를 그리더라도 그것을 함께 읽어줄 타인이 없다면 이 작업은 끝까지 이어지기 어려울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누구라도 이 그림에 대해 말해줄 사람, 우선은 그냥 바라봐 줄 사람,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감상을 나눠줄 사람이나 공동체 같은 것 말이다. 

과거에는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사람들과 멀어지고 싶어지기 마련이었는데, 요즘의 나는 어떤 의미에서 타인을 갈망하고 있다. 이야기가 작가 혼자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도 배워가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역주: 원래는 지각 심리학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완결성/폐쇄성의 법칙principle of closure’이라고 부른다. 원문에서는 closure라는 단어를 단독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본 번역에서는 완전한(=완결적인) 상을 만들어내는 정신의 연상작용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하여 ‘완결성 연상(closure association)이라고 지칭하여 사용하기로 하겠다.(‘만화의 이해’, 71쪽 인용)

**스콧 맥클라우드 홈페이지에서 자료를 다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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