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9년 어느 가을날, 미국 보스턴 광장 교수대 위에서 여자 한 명이 이미 목에 밧줄을 감은 채 서 있었다. 메리 다이어(Mary Dyer, 1611–1660)는 청교도가 지배하던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서 퀘이커교도 금지법을 반복적으로 어긴 죄로 처형당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막바지에 사면령이 내려졌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이고 살았네" 하고 고향으로 냅다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메리 다이어는 그냥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1660년 5월에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왔고, 같은 해 6월 1일 공개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 죽음을 예약하고 다시 온 것이다. 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우리가 2026년 한국에서도 곱씹어봐야 할 이야기의 핵심이다.
청교도 유토피아의 실체: 자유를 찾아왔다가 자유를 탄압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왔던 사람들이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자기들이 권력을 잡자마자 무엇을 했는가? 자기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진 가장 아이러니한 특징 중 하나다. 핍박받던 자가 권력을 잡으면 핍박하는 자가 되는 것.
1630년대 매사추세츠는 사실상 종교 독재 국가였다. 앤 허친슨(Anne Hutchinson, 1591–1643)은 하나님이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개인에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주장했다가 1637년에 추방당했다. 메리 다이어는 허친슨의 친구였고, 그녀와 함께 추방되어 로드아일랜드로 갔다. 허친슨이 1643년 8월 원주민 공격으로 사망했을 때 청교도 지도자들은 이를 신의 심판이라고 환호했다. 자기들 말 안 듣는다고 사람 죽은 걸 축하하는 게 과연 기독교 정신일까?
퀘이커: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이단
그렇다면 퀘이커교도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청교도들이 그렇게 두려워했을까?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가 영국에서 시작한 퀘이커교는 모든 사람에게 '내면의 빛'이 있으며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직자가 필요 없고, 맹세와 폭력을 거부하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꽤 합리적인 주장 아닌가? 그런데 1650년대 청교도들에게 이것은 체제 전복적 사상이었다. 성직자의 권위를 부정하는 순간, 성직자가 곧 권력자였던 사회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1656년 8명의 퀘이커교도가 배를 타고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었다. 범죄? 퀘이커교도라는 것. 그게 다였다.
네 번 체포되고도 다섯 번째 왔다
메리 다이어의 이야기는 집요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1657년 보스턴에 돌아온 그녀는 즉시 투옥되었고 추방당했다. 추방명령을 어기고 돌아오면 사형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녀는 추방명령을 세 번이나 어겼다.
1659년 10월, 그녀는 네 번째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교수대에 올랐을 때 얼굴을 가리고 목에 밧줄이 감겼을 때 사면 명령이 떨어졌다. 이때 그녀가 한 말을 들어보자. "나는 당신들로부터 피 묻은 죄를 씻어주러 왔다." 보스턴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도, 1660년 5월 21일 다섯 번째로 보스턴에 왔다.
1660년 6월 1일 오전 9시, 그녀는 보스턴 광장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면 살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부했다. "아니요. 나는 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왔고, 그분의 뜻 안에서 죽음까지 충실하겠습니다."
죽음이 변화를 만들다
메리 다이어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1661년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는 퀘이커교도라는 이유로 누구도 처형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흥미롭게도 메리 다이어의 박해자 중 한 명이었던 험프리 애서턴(Humphrey Atherton, ?–1661)은 1661년 9월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고, 많은 퀘이커교도들은 이를 신의 징벌로 해석했다. 그가 메리를 교수대에 매달았을 때 "다른 사람들이 본받도록 깃발처럼 매달렸다"고 말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1959년, 메리 다이어의 동상이 매사추세츠 주 의사당 앞에 세워졌다. 한때 그녀를 이단으로 처형했던 바로 그 땅에서 말이다.
한국이 배워야 할 것들
2026년 한국에서 메리 다이어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다수의 폭정은 언제나 '정의'의 이름으로 온다. 메리 다이어를 처형한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악행을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질서를 지키고 신앙을 보호한다고 믿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사회질서', '국가안보', '전통가치' 같은 그럴듯한 명분으로 소수자를 억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둘째, 박해받던 자가 박해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영국에서 박해받던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에서는 박해자가 되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도 권력을 잡은 후 과연 자신들이 싸웠던 권위주의와 다른 모습을 보였는가? 이 질문은 언제나 유효하다.
셋째, 양심에 따른 행동의 힘이다. 메리 다이어는 결코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의 무기는 오직 자신의 몸과 신념뿐이었다. 그녀는 단지 보스턴에 '있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체제를 뒤흔들었다. 오늘날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세월호 유가족들, 기후위기 활동가들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런 '존재의 저항'이다.
넷째, 법이 곧 정의는 아니다. 메리 다이어는 법을 어겼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법 자체가 부당했다. 결국 역사는 메리 다이어가 옳았다고 판결했다.
다섯째,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 청교도들의 신정정치가 만들어낸 참극을 보라. 종교적 신념이 정치권력과 결합할 때 어떤 괴물이 탄생하는지 메리 다이어의 이야기는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종교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때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2026년, 우리의 메리 다이어들은 누구인가?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메리 다이어들이 있다.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이주민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가들, 기후정의를 외치는 청년들. 이들은 현재 지배적인 '상식'에 도전하며 때로는 법을 어기기도 한다. 우리사회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1660년의 보스턴처럼 교수대로 보내지는 않지만, 사회적 죽음, 법적처벌, 명예훼손으로 내몰지는 않는가?
메리 다이어가 교수대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우리로부터 피 묻은 죄를 씻어주려" 온 것인지도 모른다. 부당한 법과 제도를 바로잡으라고 우리에게 경고하러 온 것일지도.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배울 수도 있다
메리 다이어의 이야기가 주는 가장 큰 위안은 이것이다. 결국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 시간이 걸릴 수는 있다. 그녀가 죽고 거의 300년 후인 1959년에야 동상이 세워졌으니까. 그러나 역사는 누가 옳았는지 기억한다.
1660년 보스턴 광장에서 목을 매달린 여자는 '깃발'이 되었다. 험프리 애서턴이 조롱조로 한 말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메리 다이어는 정말로 깃발이 되었다.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개인의 존엄성이라는 깃발 말이다.
메리 다이어는 두 번 교수대에 섰다. 한 번은 살아서 내려왔고, 한 번은 죽어서 역사에 남았다. 그녀가 지키려 했던 가치들이 2026년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교수대 위에 서 있지 않은지, 우리 모두 돌아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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