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다 살아내고 나면 우리는 불을 끄고 화면을 켠다. 영화관의 어둠이든, 집 안의 작은 스크린이든 그 앞에 앉는 순간만큼은 잠시 가쁜 호흡을 멈출 수 있다. 바쁘게 밀려오던 일정과 생각들이 한 걸음 물러서고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앉는다. 영화는 그렇게 일상의 틈을 연다.
영화의 가장 큰 유익은 삶을 대신 살아준다는 데 있다. 스크린 속 인물의 선택과 실패, 후회와 용서를 지켜보며 우리는 울고 웃는다. 아직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을 미리 통과하고 언젠가 마주할 감정을 예행연습하듯 건너간다. 영화는 현실에서 도망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필자는 두 주 전에 24년간 살았던 단독주택에서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센터가 사다리차를 이용해 전문적인 기술로 아파트 4층으로 짐은 옮겨줬지만 집 안 곳곳에는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는 이삿짐 상자들을 정리하는 것은 오롯이 아내와 필자의 몫이었다. 일주일간 정리해도 버릴 것과 남길 물건을 쉽게 결정하지 못한 채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월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짐 정리를 잠시 멈추고 영화 한 편을 보자고 의기투합해 요즘 박스오피스에서 조용히 역주행하고 있는 ‘신의 악단’이라는 영화를 봤다.
‘신의 악단’은 북한 보위부 소속 장교가 외화벌이를 위해 가짠 찬양단을 조직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휴먼 드라마다. 김형협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박시후, 정진운, 태항호, 서동원 등 개성파 배우들이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헝가리와 몽골 등 해외 로케이션을 통해 북한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구현하며 음악과 유머, 감동을 더해 ‘가짜’ 찬양단이 ‘진짜’ 하모니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렸다.
처음 그들의 이야기는 음악보다 계산에 익숙했고 믿음보다는 형식이었다. 음악은 있었지만 감동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짜로 진짜 찬양을 반복하면서 점점 더 진짜로 변화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우리가 연기하듯 선택한 행동이 결국 우리 자신을 만든다”라며 겉으로 착한 척하는 행동조차 계속 반복되면 실제 인격을 빚어 간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감동이 있었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은 출발선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속 찬양단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기적이 아니라 조금 늦더라도 방향이 맞으면 결국 진짜가 된다는 것이다.
진짜 찬양단이 돼 눈 덮인 산을 오르는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쩌면 이삿짐 상자들 사이에 숨어 있는 나의 삶과도 닮아 있었다.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이삿짐처럼 아직 완전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일상 말이다.
빠르게 일상의 시간이 지나가지만 우리는 무엇이 힘든지도 모른 채 다음 일정으로 밀려간다. 새로운 아파트에서는 조금은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바르게 정하는 삶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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