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줄 평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자못 흥에 겨워 운다.”
▲시 한 편
<봄> - 박태건
겨울 숲은 말향고래처럼 울었다
가장 거대했기에 가장 먼저 멸종된
침묵의 세계
어떤 울음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벽을 생각하면 천장도 바닥이었다
벽 틈에서는 누구나
벽이 되어 산다
이제부터 바다를 생각하기로 한다
울음이 모이는 엄마의 바다
가장 낮은 곳에서
겨울을 견디는
▲시평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대왕고래다. 흰긴수염고래라고도 불리는 대왕고래는 몸길이가 평균 25~30m, 몸무게는 최대 190톤까지 나간다. 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말향고래의 수컷은 몸길이가 약 19m에 달한다. 머리가 매우 육중한 말향고래는 향유고래나 향고래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한 마리의 향유고래에서 20~40통의 기름을 얻을 수 있는데, 이를 얻기 위한 남획으로 멸종위기를 맞았다. “가장 거대했기에 가장 먼저 멸종”됐다고 했지만, 상업적 목적의 포경 금지 이후 서서히 개체수를 회복하고 있다.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데 사라져간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겨울 숲은 생명력이 잠시 멈춘 곳이다. 시적 화자는 이 적막한 겨울 숲에서 거대한 생명체인 말향고래의 울음을 듣는다. 그 울음은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온다. 살려달라는 내면의 소리면서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는 “침묵의 세계”다. 겨울 숲은 바다, 말향고래는 시적 화자와 닮았다. 숲과 바다는 경계가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탁 트인 공간이다. 숲과 달리 벽이나 천장이 있는 공간은 폐쇄적이다. 안과 밖이 철저히 분리된 공간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벽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고립된 존재라는 확인이다. “천장도 바닥”이라는 인식은 내면과 외면, 수직과 수평이 심리적으로 무너진 상태를 의미한다. 바닥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바닥을 인식하고, 비로소 삶의 반등을 시도한다. 그 전환은 “이제부터 바다를 생각하기로 한다”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바다를 생각한다는 것은 삶의 환기면서 존재의 확인이다. 절망적인 상황과 삶의 방향을 상실한 바닥을 딛고 다시 일어선다. 겨울 숲에서의 슬픔이나 폐쇄적인 벽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엄마의 바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울음, 즉 슬픔이나 상처가 모이는 “가장 낮은 곳”은 비참한 자리가 아니라 엄마의 품 같은 치유의 공간이다. 생명력을 간직한 겨울 숲에서 울고 있다가 가장 낮은 곳에서 삶의 반등을 시도한다. 단순히 계절의 변화로서의 봄이 아니라 혹독한 추위와 침묵의 시간을 견딘 끝에 도달하는 치유의 세계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시련을 겪고 나서야 인생의 봄이 찾아온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Copyright ⓒ 뉴스로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