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업의 최근 실적표는 하나의 결론을 가리킨다. “가격만으로는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 시장.” 석유화학·배터리소재·철강의 성적표는 그 전환점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LG화학은 지난해 영업이익 1조1809억원을 냈지만 순손실 9771억원으로 적자 전환했고, 4분기에는 4133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한화솔루션은 연간 영업손실 3533억원, 4분기 4782억원 손실로 적자 폭이 확대됐다. 롯데케미칼·LG화학 석유화학 부문·한화솔루션 케미칼 부문 등을 포함한 석유화학 6개사의 합산 영업손실은 1조6502억원으로 전년보다 1조원 넘게 늘었다. 업황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산 가격만 높게 책정하는 전통적 M&A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이유다. 이런 환경에서는 “몇 배에 파느냐”보다 “어떤 조건으로 거래하느냐”가 딜의 성패를 가른다.
석유화학에서 불황형 M&A가 의미를 갖기 위한 전제는 명확하다. 첫째는 가동률이다. 공급과잉 국면에서는 설비를 묶어 생산량을 줄이지 않으면 마진이 살아나지 않는다. 단지 내 중복 설비를 통합하거나 합작법인(JV)으로 묶어 고정비를 분산시키는 거래가 살아나는 이유다. 단순한 자산 매각이 아니라, 생산량 조정과 비용 구조 개편이 결합돼야만 기업가치가 실질적으로 개선된다.
둘째는 고정비 절감이다. 인력·유틸리티·정비비를 묶어 낮추는 구조조정이 수반되지 않는 매각은 실질적 의미가 없다. 셋째는 스프레드 회복 조항이다. 현재 석유화학 스프레드가 바닥권에 머물러 있는 만큼, 거래 가격을 단순 고정하기보다 “스프레드가 특정 수준을 회복하면 추가 대금을 지급”하는 언아웃 구조가 필수다. 롯데케미칼·LG화학·한화솔루션이 모두 적자에 빠진 상황에서, 석유화학 딜은 단순한 자산 매각이 아니라 감산·통합·성과연동이 결합될 때만 실질적 가치가 생긴다.
배터리소재 영역은 변동성이 한층 복합적이다. 메탈 가격, 고객사의 재고 조정, 각국의 정책 보조금이 동시에 기업가치를 흔든다. 그래서 이 산업에서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거래 방식은 전통적 인수합병보다 마일스톤 기반 투자 계약이다. 반드시 포함돼야 할 핵심 조항은 세 가지다. △고객 장기공급계약(LTA) 확정 시 추가 자금 집행 △수율·원가 목표 달성 시 후속 투자 △메탈 가격 구간에 따른 가격 조정 조항이다. 한화솔루션이 올해 CAPEX를 1조9000억원에서 1조2000억원으로 줄인 사례처럼, 불황기에는 현금을 보존하면서 조건이 충족될 때만 단계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이 합리적이다. 배터리소재 분야에서 “한 번에 크게 사는 딜”은 줄고, 옵션형 자본배분이 사실상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철강은 또 다른 경로로 재편된다. 포스코홀딩스는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15.7% 감소했다. 철강 본업의 원가 혁신에도 불구하고, 이차전지 소재 부문의 초기 가동 비용과 인프라 부문 일회성 손실이 실적을 끌어내린 결과다. 반면 현대제철은 원가 절감 효과로 영업이익이 37% 늘었지만, 미국 전기로 제철소 건설에 58억달러 투자를 결정하며 거대한 탈탄소 CAPEX 부담을 안게 됐다. 같은 철강 기업이라도 수익 구조와 투자 사이클에 따라 체력이 엇갈리는 장면이다.
이 때문에 철강에서의 불황형 M&A는 “투자 부담을 누가 지느냐”가 핵심 변수로 떠오른다. 탈탄소 설비는 초기에는 감가상각과 금융비용을 늘려 이익을 깎지만,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효율과 원가 경쟁력을 높여 현금흐름을 개선한다. 결국 거래 구조는 단순한 가격 협상이 아니라, CAPEX 분담과 성과연동 수익 배분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설계될 수밖에 없다. 범용 철강은 중복 설비를 줄이기 위한 통합 압력이 커지고, 세아베스틸지주처럼 방산·원전용 특수강을 보유한 기업은 고부가 영역을 중심으로 선택적 기회를 잡게 된다.
결국 불황형 M&A가 바꾼 룰은 단순하다. 석유화학은 가동률·고정비·스프레드가 맞아야 거래가 성립하고, 배터리소재는 조건부 조항이 있어야 투자가 가능하며, 철강은 탈탄소 CAPEX의 분담 구조가 기업가치를 결정한다. 가격이 아니라 조건이 딜을 완성하는 시대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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