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택배노동자의 건강권을 이유로 새벽배송 축소 필요성을 강조해 온 정부가 이번에는 대형마트까지 새벽배송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쿠팡 등 특정 사업자에 대한 견제 차원이라고 설명하지만 시장 구조상 실질적 효과는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시에 새벽배송 확대가 불러올 노동강도 상승과 수면권 침해 등 현장 노동자의 건강 피해는 다시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9일 유통업계와 정치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정부·청와대는 전날 고위당정협의회에서 대형마트의 새벽배송을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더불어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현행 오프라인 중심 유통 규제 체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유통산업발전법 추진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번 합의는 대형마트에 적용돼 온 심야 영업 제한 규제를 손질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유통산업발전법은 2012년 재래시장 등 중소상공인 보호를 취지로 개정되면서 매장면적 합계 3000㎡ 이상 대형마트의 자정~오전 8시 영업을 제한해 왔다. 그러나 온라인 소비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규제 공백을 쿠팡 등 일부 플랫폼이 메웠고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대형마트의 온라인 영업시간 제한을 풀어 경쟁 조건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이 재래시장 등 중소상공인 보호를 위해 마련된 만 큼이들 소상공인 단체들의 반발은 즉각 터져나왔다. 지난 6일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등 중소상인·노동·시민사회단체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정·청에 관련 논의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대형마트가 노리는 것은 쿠팡이 아니라 동네 점포들이 겨우 버티고 있는 ‘근거리 배송’ 시장이다. 집 근처 마트에서 아침 7시에 바로 주문하는 식의 ‘종일 배송’이 열리면 동네 슈퍼, 편의점, 전통시장은 속수무책”이라면서 “정부·여당이 쿠팡 등 이커머스 경쟁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라고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골목상권과 중소 유통업체를 대형 유통기업과 플랫폼 기업 간 경쟁 속에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동계와 민생 관련 시민단체 역시 강경한 입장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은 성명을 내고 이번 합의를 “쿠팡 규제를 요구해 온 흐름을 거스르는 반노동적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새벽배송 확산이 노동강도 상승과 수면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는데, ‘쿠팡 견제’를 명분으로 동일한 위험을 다른 현장으로 확대할 수 있다는 취지다.
실제 정부와 여당은 지난해 10월 택배노동자의 건강권을 이유로 자정~오전 5시 새벽배송 제한을 제안한 바 있다. 민주노총은 당시 사회적 대화기구에서 심야배송 전면 금지를 요구했다.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은 야간노동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을 지속적으로 경고해 왔고 민주노총 실태조사에서는 쿠팡 새벽배송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과 짧은 휴식 실태가 거론되기도 했다.
다만 이번 규제 완화가 애초 정부가 내세운 ‘쿠팡 견제’로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온라인 유통 생태계가 이미 다변화된 상황에서 대형마트 새벽배송을 허용한다고 해도 특정 기업의 지배력을 실제로 약화시킬 만큼 시장이 재편될지 미지수라는 이유에서다.
소비자학과 이은희 교수는 본보에 “쿠팡의 멤버십 기반 혜택과 축적된 편의가 커 소비자들이 쉽게 이동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일부 소비자들은 ‘탈쿠팡’ 같은 불매 움직임을 보일 수 있지만 다수 소비자는 생활 편의와 시간 절약에 중심을 두고 소비하는 경향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온라인 시장은 대형마트 시장이 참여하지 않아도 거듭해 발전해 나갈 것”이라며 “정부가 특정 기업을 시장에서 끌어내리려 하기보다는 오프라인 인프라 등 다른 차원의 경쟁력을 키우는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당·정·청은 대·중소 유통업계 상생 방안을 담은 종합 대책을 조만간 내놓겠다고 밝혔지만 해당 대책이 노동계와 중소상공인이 제기해 온 요구를 얼마나 반영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업계 안팎에서는 새벽배송 허용 여부 자체뿐 아니라 확대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노동조건 악화와 골목상권 충격을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구체적 대책이 함께 제시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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