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의 북토피아]생각의 궤도를 이탈한 한 남자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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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일의 북토피아]생각의 궤도를 이탈한 한 남자의 밤

뉴스컬처 2026-02-09 11:54:3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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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컬처 최병일 칼럼니스트]

리스본행 야간열차
리스본행 야간열차

 

리스본행 야간열차/파스칼 메르시어/전은경 옮김/비채 

삶에는 예고 없이 방향을 바꾸는 순간이 있다. 터닝포인트가 일어나는 순간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낯선 문장 하나, 우연히 집어 든 책 한 권, 혹은 플랫폼에 서 있는 타인의 침묵때문에 일어날지도 모른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삶의 방향이 바뀌는 미묘한 순간을 그려낸 소설이다. 그리고 그 작은 균열이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어떻게 흔들어 놓는지를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따라간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본명 페터 비에리(Peter Bieri). 파스칼 메르시아는 필명이다. 스위스 출신의 철학자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이력만 놓고 보면 소설가보다는 철학자에 가깝다. 실제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소설이라기보다 철학적 산문에 가깝다는 평가도 받는다.  메르시어는 철학을 강단이 아니라 이야기 속으로 옮겼다. 추상적인 개념을 인물의 선택과 망설임, 후회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방식이다.

이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폭넓은 독자를 확보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가볍지 않고, 서사가 있지만 사유가 중심을 이룬다.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독자는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되짚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소설속 주인공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는 스위스 베른의 명문 고등학교에서 고전어를 가르치는 교사다.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장 속에서 질서 정연한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로 출근하고, 같은 교실에서 같은 문장을 설명한다. 안정적이지만 따분하다. 이미 생의 긴장감은 사라진 상태다.

어느 날, 그는 다리 위에서 자살을 시도하려는 한 여인을 만난다. 여인을 구한 뒤, 그녀의 외투 주머니에서 포르투갈어로 쓰인 책 한 권을 발견한다. 제목은 '말씀의 연금술사'. 저자는 아마데우 지 프라두. 낯선 언어, 낯선 이름, 그러나 몇 줄 번역해 읽은 문장은 그레고리우스의 내면을 강하게 흔든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문장은 그를 멈춰 세운다. 결국 그는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작가 프라두의 흔적이지만, 실은 자기 자신이다.

리스본이라는 공간, 기억과 저항의 도시. 리스본은 이 소설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포르투갈 독재정권 시절을 살아간 지식인과 저항운동가들의 기억이 켜켜이 쌓인 도시다. 프라두는 살라자르 독재에 저항했던 의사이자 사상가였고, 그의 글은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사유의 기록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에서 프라두의 친구, 연인, 동료들을 하나씩 만나며 그의 삶을 재구성해 나간다. 동시에 프라두의 삶은 거울처럼 그레고리우스 자신의 삶을 비춘다. 저항하지 않았던 삶, 안전한 선택만을 해온 삶, 그러나 그만큼 많은 가능성을 포기한 삶. 이 과정에서 독자는 묻게 된다. 우리는 과연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흘러온 삶을 살고 있는가.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극적인 사건으로 독자를 붙잡지 않는다. 기차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사건들 부터 내면의 변화까지 느린 호흡으로 천천히 훑어낸다. 이때문에 어떤 이들은 리스본까지 가지 못하고 책을 덮어 버린다. 지루함을 참고 조금만 내닿으면 생의 이면에 닿게 된다. 생은 수많은 질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성이다.  인간은 언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가, 용기는 무엇이며 후회는 언제 시작되는가,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을 우리는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가.

메르시어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문장을 남긴다. 그 문장들은 독자의 삶 속에서 천천히 작동한다. 책을 덮고 나서도, 어느 날 문득 다시 떠오른다. 이 소설이 오래 남는 이유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여행 소설도, 철학 소설도, 성장 소설도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요소를 품고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지금의 삶이 전부일까”라는 질문을 정중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던진다.

야간열차는 결국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더 중요한 것은 도착이 아니라, 탑승 그 자체다. 그레고리우스가 열차에 오르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은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아직, 탈 수 있는 열차가 남아 있는가.

 

뉴스컬처 최병일 newsculture@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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