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플러스] 좀비 아포칼립스 너머 인간의 고독, '더 라스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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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플러스] 좀비 아포칼립스 너머 인간의 고독, '더 라스트맨'

뉴스컬처 2026-02-09 11:14:33 신고

[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비극은 늘 거창한 재난의 얼굴로 다가오지만, 끝까지 들여다보면 결국 한 인간의 고독으로 수렴된다. 뮤지컬 ‘더 라스트맨’은 바로 그 감정의 핵심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품이다. 좀비 바이러스로 인류가 멸망한 세계, 오직 한 명의 생존자만 남았다는 설정은 익숙한 아포칼립스 서사를 떠올리게 하지만, 작품이 오래 붙들고 있는 것은 생존 스릴이나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철저히 ‘혼자 남겨진 인간의 내면’이다.

무대 위에 오직 한 명의 배우만 존재하는 1인극 형식은 작품의 가장 강력한 특징이다. 대사를 주고받을 상대도, 갈등을 직접 부딪칠 타인도 없다. 대신 관객은 생존자의 호흡과 중얼거림, 무너졌다가 다시 붙드는 감정의 결을 고스란히 따라가게 된다. 무대는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이라기보다 한 인간의 의식 속을 들여다보는 심리적 풍경에 가깝다.

뮤지컬 '더 라스트맨' 22년 공연. 사진=더웨이브
뮤지컬 '더 라스트맨' 22년 공연. 사진=더웨이브
뮤지컬 '더 라스트맨' 22년 공연. 사진=더웨이브
뮤지컬 '더 라스트맨' 22년 공연. 사진=더웨이브

배경이 되는 신림동의 방공호 B-103은 물리적 은신처이면서 동시에 감정이 응축된 밀실이다. 바깥 세계와 단절된 이 공간 안에서 생존자는 기억과 죄책감, 희망과 체념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관객은 그 안에서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 일상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하루는 끝없이 늘어지고, 1년은 한순간에 압축된다. 문명 이후의 시간은 시계가 아니라 심리 상태에 의해 측정된다.

‘더 라스트맨’이 흥미로운 실험을 이어가는 대목은 배우마다 ‘생존자의 직업’ 설정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같은 대본, 같은 상황이라도 인물의 과거가 바뀌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 역시 완전히 달라진다. 누군가에게 생존은 끝까지 완수해야 할 책임처럼 느껴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형벌처럼 다가온다. 관객은 캐스팅에 따라 전혀 다른 결의 서사와 마주하게 되고, 이는 반복 관람의 가치를 서사의 다층성으로 확장시킨다.

작품에서 좀비는 적극적으로 등장하는 위협이라기보다 이미 휩쓸고 지나간 재난의 잔향에 가깝다. 진짜 공포는 문 밖이 아니라 문 안에 있다. 말할 대상이 사라진 인간이 언어를 어떻게 유지하는지, 기억이 흐릿해질까 두려워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행위가 얼마나 처절한지, 작품은 그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결국 좀비 아포칼립스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과정을 비추는 거대한 비유 장치가 된다.

음악 또한 이러한 정서를 떠받치는 중요한 축이다. 넘버들은 극적인 사건을 폭발시키기보다 감정의 미세한 균열을 확대해 보여준다. 멜로디는 속삭이듯 흐르다가도 어느 순간 억눌린 감정이 터지듯 치솟는다. 화려한 군무와 합창으로 에너지를 분출하는 다인극 뮤지컬과는 전혀 다른 결의 카타르시스다. 관객은 박수로 흥을 터뜨리기보다 숨을 죽인 채 한 인간의 붕괴와 버팀을 지켜보게 된다.

뉴욕과 도쿄 리딩 공연, 상하이 무대 진출 등 해외에서 먼저 작품성을 인정받아 온 이력은 이 작품이 다루는 정서가 얼마나 보편적인지를 보여준다. 재난의 양상은 문화권마다 다를 수 있지만, 혼자 남겨졌을 때 인간이 마주하는 감정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더 라스트맨’은 그 보편성을 고독이라는 감정에 응축해 담아낸다.

동시에 작품은 한국 창작 뮤지컬의 확장 가능성을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웹뮤지컬이라는 디지털 플랫폼을 원작으로 출발해 무대극으로 이어진 제작 과정, 그리고 상업 무대에서 흔치 않은 1인극 형식은 공연예술이 얼마나 유연하게 변주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하나의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매체를 건너며 새로운 호흡을 얻는다.

뮤지컬 '더 라스트맨' 포스터. 사진=더웨이브
뮤지컬 '더 라스트맨' 포스터. 사진=더웨이브

오는 3월 24일부터 6월 7일까지 공연되는 세 번째 시즌은 이러한 작품의 성격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무대가 될 전망이다. 기존 시즌에서 깊이 있는 해석을 보여준 김지온과 홍승안이 다시 생존자로 돌아와 한층 농밀해진 감정선을 선보이고, 김이후와 김찬종이 새롭게 합류해 전혀 다른 결의 생존자를 구축한다. 네 배우가 만들어낼 서로 다른 고독의 얼굴은 같은 텍스트가 얼마나 다채로운 결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제작진 역시 탄탄하다. 극작 김지식, 작곡 권승연, 연출 김달중, 음악감독 홍정의가 다시 의기투합해 작품의 밀도를 끌어올리고, 무대·조명·영상 디자인 팀은 고립된 방공호의 정서를 시청각적으로 구현한다. 100분 동안 인터미션 없이 이어지는 공연은 관객을 생존자의 시간 안에 가두며, 극장을 나설 때까지 쉽게 숨을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더 라스트맨’은 거대한 재난을 배경으로 하지만, 결국 끝까지 남는 것은 한 사람의 숨소리와 마음의 흔들림이다. 공연이 끝난 뒤 관객의 머릿속에 오래 맴도는 것은 스펙터클한 장면이 아니라, 혼자 남겨진 인간이 끝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들었던 사소한 기억과 감정들이다. 세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작품은 담담하지만 집요하게 되짚어 보게 만든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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