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비보, 궤도를 이탈하다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40분. 겨울의 끝자락, 차가운 정적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 박 선생님이 전한 말은 짧고 무거웠다. "함석헌 선생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비보를 듣자마자 병원으로 내달렸다. 차갑게 식어가는 스승의 유해 앞에 섰을 때, 나는 마치 내 존재의 한 부분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극심한 상실감을 느꼈다. 그분은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내 삶의 나침반이자 영적인 지주였다. 병원을 나선 지 세 시간 만에 나는 8년간 몸담았던 철도청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주위에서는 미쳤다고 했다. 안정적인 철도공무원의 삶, 보장된 노후를 한순간에 던져버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스승의 부재는 나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다시 던졌고, 나는 그가 남긴 정신의 자취를 따라 인생의 궤도를 완전히 수정하기로 결심했다.
연세대 강당의 사자후와 '함석헌 환자'
스승과의 첫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1980년대 봄, 전두환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그의 강연 소식을 듣고 나는 무작정 학교로 향했다. 당시 나는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온 상태였다. 짧은 머리는 까딱하면 사복형사나 프락치로 오해받기 딱 좋았다. 강연장 입구에서 명단 확인을 하던 학생들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그때 마침 명단 확인 과정에서 한 학생의 순서가 꼬이는 틈을 타, 나는 앞선 학생의 이름인 '철학과 황OO'을 내 이름이라 주장하며 강당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 뻔뻔한 거짓말 덕분에 나는 생애 가장 찬란한 두 시간을 선물 받았다. (지금도 이름이 도용된 그 학생에게는 깊은 미안함을 전한다.)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찬 강당은 터질 듯한 열기로 가득했다.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한복을 입고 단상에 선 노인. 그가 토해내는 사자후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억눌린 자들의 가슴을 뚫어주는 해방의 소리였고,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죽비 소리였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나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받았듯, 나는 그날 함석헌을 통해 '지상에서 영원으로' 나아가는 문을 발견했다. 그날 이후 나는 스스로를 '함석헌 환자' 혹은 '함석헌 중독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수난 속에 핀 꽃, 씨알의 철학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함석헌은 한국 근현대사의 수난을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이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제도권 종교의 틀을 넘어 보편적 진리를 향해 나아갔다. 1930년대, 일제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조선의 혼을 말살하려 할 때 그는 붓을 들어 한국역사를 써 내려갔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성서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고난의 역사'였다.
그의 절친한 벗이었던 김교신은 당시를 회상하며 "5천 년 역사에 이토록 위대한 철학적 사관을 제시한 이는 없었으나, 정작 그 강연을 듣는 이는 스무 명도 채 되지 않는다"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한탄했다. 그러나 일제는 함석헌의 글에 담긴 폭발력을 예민하게 감지했다. 그를 체포한 일본인 형사는 이렇게 말했다. "칼을 들고 덤비는 놈들은 다루기 쉽다. 하지만 너희놈들처럼 조선의 정신을 500년 앞서 깨우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악질이다."
이때의 사유는 훗날 《뜻으로 본 한국역사》(원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로 완성되었고, 2009년에는 아시아의 지성을 대표하는 100대 명저 중 하나로 선정되며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퀘이커, 종교개혁의 극좌파에 서다
함석헌의 위대함은 머무르지 않는 사유에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며 진리를 향해 진화했다. 1961년 역사서를 개정하며 그는 폭탄선언과도 같은 글을 남긴다. "이제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가 아니며, 성서만이 완전한 진리의 원천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깊이 파고들면 결국 하나로 만난다."
이미 1953년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그는 이승만 정권에 아부하던 기독교 지도자들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기독교인에게 주는 글>에서 그는 "나는 기독교의 이단이 되겠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진리는 더 위대하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교회 위에 죽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퀘이커교에 귀의한 것은 이러한 보편주의적 사상의 필연적 결과였다. 퀘이커 역사학자 하워드 브린턴은 퀘이커리즘을 '종교개혁의 극좌파'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좌파'란 단순히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제도와 권위를 부정하고 내면의 빛(Inner Light)에 따라 행동하며 소외된 자들과 연대하는 철저한 실천성을 의미한다. 함석헌에게 퀘이커 신앙은 자본주의의 탐욕에 맞서 부의 재분배를 주장하고, 억눌린 '씨알'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살아있는 투쟁의 근거였다.
거리의 예언자,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다
함석헌은 권력 앞에 단 한 번도 무릎 꿇지 않았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모든 언론이 숨을 죽이고 지식인들이 곡학아세할 때 오직 그만이 정권의 심장을 향해 쓴 소리를 내뱉었다. 송건호 전 한겨레신문 대표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며 함석헌의 무구한 담대함을 경외했다.
일흔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쉬지 않았다. 지식인들의 잡지였던 《사상계》가 강제 폐간되자, 그는 민중을 뜻하는 '씨알'을 잡지 제호로 내걸고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씨알이 주인이다"라는 그의 선언은 당시 왕조적 통치구조에 갇혀 있던 한국사회에 던진 민주주의의 폭탄이었다. 1970년대 한국 민주화투쟁의 현장에서 발표된 거의 모든 성명서의 맨 앞줄에는 늘 함석헌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단순히 비판만 하는 지식인이 아니었다. 1967년 장준하가 옥중 출마를 했을 때, 그는 유세 현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장준하를 살려 달라. 그를 국회로 보내지 않으면 저 감옥에서 죽고 만다"고 호소했다. 그 진심어린 호소에 감동한 시민들은 한국역사상 최초로 옥중 당선인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우리시대가 응답해야 할 함석헌의 질문
스승이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났다. 나는 그의 사상을 체계화하기 위해 지난 1990 영국으로 건너가 학사, 석사, 박사논문을 전부 함석헌의 삶과 사상에 대해 썼다. 2000년 귀국 후에는 그의 평전을 국문과 영문으로 펴내며 그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 전념했다. 지난 40여 년은 세월은 철도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삶을 버리고 사학자로, 근본주의자에서 보편주의자로, 교조주의자에서 인본주의자로 나를 탈바꿈시킨 고통스럽지만 영광스러운 수행의 시간이었다.
오늘날 일부 세력은 함석헌을 여야를 아우르는 '중립적' 성자로 박제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치열한 삶을 모독하는 일이다. 함석헌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약자의 편이었고, 불의한 권력에 대해서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을 때 중립을 지키는 것은 강자의 편에 서는 것"이라는 퀘이커의 경구처럼, 그는 언제나 고통 받는 현장의 맨 앞줄에 있었다.
이제 함석헌은 우리에게 묻는다.
"자본의 논리가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이 시대에, 그대들은 여전히 안락한 경건의 뒤에 숨어 있지는 않은가?"
"소외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그대들이 가진 기득권과 안전을 포기할 용기가 있는가?"
함석헌이 보여준 길은 꽃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시밭길이었으나 빛을 향해 열린 길이었다. 그가 남긴 '씨알'의 정신은 이제 우리 가슴 속에 살아남아, 이 척박한 시대의 어둠을 뚫고 솟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빛을 따르는 삶은 비록 고되지만, 그 길 끝에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스승의 삶을 통해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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