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올해 ○○학교 졸업앨범 계약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전화를 건 이는 자신을 경기도교육청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교육청 로고와 소속 부서·직위·사무실 전화번호는 물론, 개인 이메일과 휴대폰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심지어 업체가 과거 ○○학교와 맺었던 계약 이력까지 뻔히 알고 있었다.
계약을 의논하며 어느 정도 교류가 되면 본색이 드러난다. 빔프로젝트 등 특정 물품을 경기도교육청 대신 사달라며 ‘구매 대행’을 요청하는 방식이다. “저희가 당초 340만원에 구매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30만원이나 올렸어요. 관공서라 비싸게 부르는 듯 하니 대표님이 대신 단가만 확인해주세요”라며 나중에는 구체적인 제품명을 전달하고, 구매까지 부탁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고사 위기에 처한 영세 인쇄업체들을 노리는 신종 사기가 경기도 전역에 번지고 있다. 최근 일주일 동안 교육공무원을 사칭한 사건이 20건 이상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등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6일 경기도사진앨범인쇄협동조합 등에 따르면 지난달 29일부터 현재까지 안양·군포·부천·의정부 등 경기도 전역에서 사진앨범인쇄 관련 업체들을 대상으로 사칭 시도가 빗발치고 있다. 조합이 파악한 유사 사례만 20곳 이상이다.
수원에서 관련 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2~3년 전 거래하던 고등학교 졸업앨범 건으로 연락이 와 의심하지 못했다. 입찰 내역과 학교와의 관계까지 꿰뚫고 있어 속을 뻔했지만 학교 방학 기간에 연락이 온 점을 수상히 여겨 화를 면했다”며 “오산의 한 업체도 현재 거래 중인 학교를 지목해 접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의왕과 용인에 사업장을 둔 또 다른 업체 대표 B씨는 두 곳 모두에서 똑같은 수법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다른 조합원들이 받은 명함을 모아보니 실제 교육청 번호와 한두 자리만 바꿔 놓기도 해 대충 보면 속기 쉽다”며 “큰 학교 졸업앨범 계약 건은 놓치기 아까운 제안이고, 실제 피해를 입고도 이미지나 향후 학교와의 관계를 우려해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을 주저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향후 2~3년간의 앨범 콘셉트 자료를 가지고 조만간 방문할 테니 만나자’, ‘구매 대행을 거절하면 앨범 계약이 성사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이번 사기의 주된 내용이다.
특히 사칭범들은 규모가 크고 계약 금액대가 높은 학교를 범행 미끼로 삼고 있다. 통상 소규모 학교의 졸업앨범 계약금은 200만원 선에 그치지만 규모가 큰 학교는 2천만원대에 달하는데, 여기에 1천만원 정도를 더 부르며 접근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학생 수가 줄어 졸업앨범 제작 물량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영세업체들이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긴 쉽진 않다. 업체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물품 대금을 선결제하면 그 즉시 연락은 끊기고 잠적한다.
사칭범이 구매 대행을 요청하며 제시한 물품 공급업체는 실존하는 업체였다. 주소와 빔프로젝터 납품 등 주요 사업 내용도 일치했다. 하지만 이들 또한 피해자다. 해당 빔프로젝터 업체 관계자는 “명함에 ‘김 상무’라는 인물이 적혀있는데 저희는 해당 인물이 아예 없다”며 “왜 저희 회사 정보가 도용됐는지 모르겠으나 전날(5일)에도 유사한 확인 전화가 걸려와서 의아해하고 있던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기도사진앨범인쇄협동조합 관계자는 “사진 업체를 노린 이러한 수법은 제주·광주·서울·대구·전북 등에서도 발생하고 있다”며 “졸업앨범 계약을 성사 시키기 위해 이용되는 구매 대행 비용이 수천만원에 달해 자칫 전국적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사례가 널리 알려져 추가 피해자가 없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사태를 인지한 경기도교육청 역시 강력 대응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도교육청 관계자는 “최근 공무원을 사칭한 사기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어 도교육청 역시 1월29일자로 교육지원청과 학교들에게 ‘조심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바 있다. 하지만 ‘인쇄’ 관련 이야기는 금시초문이고, 공문 전달 전후로도 경기도교육청 직원을 사칭한 사례는 없었는데 이번이 처음”이라며 “절차에 따라 즉시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고 대응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도교육청이 졸업앨범 계약을 직접 중개하거나 특정 물품의 구매 대행을 요구하는 경우는 없으니 의심스러운 연락을 받으면 즉시 신고해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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